완벽한 끝이라니, 그런 건 없다.

by 렙쿤

작업실에 도착하면 늘 비슷한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먼저 차를 끓이거나 커피를 내린다.

오늘의 기분에 맞는 플레이 리스트를 고르고, 그림에 쓸 물을 떠놓은 뒤에야 비로소 붓을 든다.

그림이 마르는 동안은 다음 작업을 고민하거나 기록을 남긴다.

아니면 병렬로 다른 작업을 이어가기도 한다.

창작이라는 일에는 완벽한 끝이라는 게 없다.

시작하면서 언제쯤 끝이 날지를 생각하고, 그리는 동안에는 같은 부분을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한다.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육아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과의 하루는 늘 예측불허다.

계획한 대로 되는 일이 없고, 갑작스러운 일이 터지고, 상황에 맞게 일들을 수습하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가있다.

창작과 육아, 전혀 다른 세계지만 닮은 부분이 있다.

둘 다 완벽한 끝이 없다는 것.


나는 완벽하게 하나를 끝내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분명한 의사태도를 지니기보다 살짝 애매한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집중력도 그다지 좋지 않아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일들을 오가는 편이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책도 병렬로 읽는 편이고, 오디오 북을 들으며 설거지를 하고 중간중간 아이들과 소통도 한다.

소위 멀티태스킹이 잘…. 은 아니고 그냥 되는 사람 정도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가끔 단시간 내에 작업을 마쳐버리는 작가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본 어떤 작가는 하룻밤 사이에 300호나 되는 큰 작업을 단숨에 완성해버리기도 했다.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계획한 일을 마무리 짓는 사람들, 무언가를 착착 정리해 가는 그 능숙함이 멋있어 보일 때가 있다.

나도 살 수만 있다면 돈 주고 그런 능력 어디서 사고 싶다.

‘내가 치밀한 계획 없이 시작해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계획은 세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완벽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만 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 덕에 해야 할 일이 늘 산적한 엄마의 삶과 창작자의 삶을 병행하는 일이 나쁘지만은 않다.

어릴 때는 누구보다 쉽게 완벽을 내려놓는 나의 이 유연함(?)이 그토록 미웠었는데, 지금은 완벽과는 더 멀어졌지만 순리에 순응하며 엉성하긴 해도 성실히 하루를 이어가는 나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그 유연함 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업하다 말고 아이 준비물 주문하고, 설거지하다 말고 그림 생각이 들이칠 때면 가끔은 ’ 뭐라도 하나 제발, 개운하게 끝내버리면 좋겠다 ‘ 싶을 때도 있지만, 알과 육아와 살림 +a..

어쩌면 이 둘은 완벽히 끝낼 수 없는 일을 그저 매일같이 이어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엉성할지라도 그저 매일을 살아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완벽한 끝이라니, 그런 건 내 삶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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