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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재 Mar 07. 2022

아기가 생겨버렸다!

그리고 14주 6일 차.

정말이지 '생겨버렸다'는 말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다. 언젠가는 아이를 키우는 원더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22년 새해의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뚝딱, 하고 아기가 만들어져 버렸다. 


며칠째 속이 울렁거렸다. 집중해야 하는 일감을 처리하느라 한 시간에도 몇 대씩 전자담배를 피워댄 탓인 줄 알았다. 자고 일어나 복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메슥거림이 밀려왔다. 소파에 앉아서 조용히 생각해보길


1.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술을 마셔왔다.

2.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담배를 피워왔다.

3.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나날을 지새우며 일을 해왔다.

4. 나는 그동안 안 해도 될 고민을 굳이 하며 속을 끓여 완벽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는 몹쓸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내가 아닐 이유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정리해야 할 유산도, 빚도, 다니고 있는 회사도 없기에 걱정은 좀 덜 할 수 있었다. 다만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어떤 병일까 고민하면서 조용히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다음날 남자 친구가 집으로 왔다. 해맑게 웃는 그 애의 얼굴을 보니 건강검진보다는 임신테스트기가 먼저 떠올랐다. 한 달쯤 전 2021년을 마무리하던 어느 밤이 퍼뜩 스쳤기 때문이다.


평소 불규칙한 생리주기 때문에 생리가 멈춰있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단지 '좀 늦네, 이번 달 무리했나 보구먼.' 하는 정도. 그러고 보니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당장 해보고 싶었지만 아침 첫 소변을 기다리며 초조한 마음을 담배로 감췄다. 


그리고 아침, 나의 새 아침 첫 새 소변은 조그마한 임신테스트기를 마치 아우토반처럼 신나게 달리더니 확신의 두 줄을 만들어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너무나 확실한 붉은색 두 줄이었다. 일요일이었지만 문을 연 산부인과를 찾아가 아기집을 확인하고 심장소리를 들었다. 아뿔싸, 정말로 아기가 생겨버린 것이다.

 

두 줄이 선명한 테스트기는 처음이었다.

아기의 심장은 쿵쾅쿵쾅 잘도 뛰었다. 덩달아 내 머릿속도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슬쩍 남자 친구 쪽을 바라봤는데,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작고 작은 생명체가 뱃속에서 쿵쾅거리고 있다니, 나야말로 태어나서 이렇게 울고 싶은 적은 처음이었다. 슬픔이 아닌 혼란 그 자체였다. 신기하기도 하고 감격에 목이 메기도 했으며 앞으로 남은 촬영과 원고가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아기야, 왜 하필 지금이니. 


나는 공황장애 약을 먹고 있었다. 담배도 많이 피우는 사람이다. 프리랜서가 된 후 일이 없는 날엔 창밖을 보며 대낮에도 맥주와 와인을 홀짝거리며 마셨다. 종합하자면 아기가 자라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란 말이다. 와락 걱정이 몰려왔다. 의사 선생님은 이제부터 안 먹고 안 피고 안 마시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축하합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받는 축하 인사였다. 동시에 기쁜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기의 심장은 잘 뛰고 있었고 남자 친구는 조그마하게 눈물을 거두고 있었다. 


우리는 올해 10월에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지만 모든 계획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나는 아기의 존재를 확인한 4주 차부터 바로 오늘, 14주 6일째까지 간헐적으로 대성통곡을 하며 웃기도 울기도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다람쥐만 해진 뱃속의 아기와는 여전히 조금 낯설고 어색한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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