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북,그 여덟번째 이야기
최근 교수님이 학기 초를 맞아 색다른 과제를 내주셨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보는 것이었다. 자기소개서는 가장 가고 싶은 기업의 양식대로 쓰라 말씀하셨다. 나는 광고인을 꿈꾸고 있는지라 꿈의 기업 00기획의 자기소개서 양식에 맞춰 쓰기로 했다. 새하얀 워드 새 페이지에 문항들을 옮겨 적었다. 폰트가 마음에 안 들어 깔끔한 글씨체로 바꿔놓았다. 그 이후 워드 파일은 한참 동안 그대로였다. 변화란 없었다. 그 앞에서 머리칼을 움켜쥐고 고통받는 나만 있을 뿐이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질문들은 총 세 가지였다. 다음과 같았다.
Q1. 00기획을 지원한 이유와 입사 후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꿈을 기술하십시오.
Q2. 본인의 성장과정을 간략히 기술하되 현재의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 인물 등을 포함하여 기술하시기 바랍니다. (작품 속 가상 인물도 가능)
Q3. 최근 사회이슈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가지를 선택하고 이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뜻 보면 평범하고 무난해 보이는 이 질문들이 몇 시간 동안만큼은 인생 최대의 난제처럼 느껴졌다. 고민의 이유는 이러했다.
지원한 이유와 이루고 싶은 꿈을 생각하자니 이제까지 생각했던 내 진로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왜 광고가 좋았던 것인지, 왜 광고인이 되고 싶었던 것인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뚜렷한 지원 이유가 없는 지원자를 기업이 원할까? 당연히 아닐 텐데. 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니 단 한 문장도 그려지지 않았다.
또, 나의 성장 과정과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 인물에 대한 질문에 이제까지 내가 했던 귀중한 경험들과 그를 위한 노력을 엮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경험은 지나갔고, 나는 이로부터 인사이트를 얻었어야 했는데, 얻은 교훈이 없었다. 교훈은 없고 노력의 나열뿐이었다. 누군가가 내가 쓴 자기소개서를 첨삭하는 상상을 했다. 온통 빨간 줄이 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노력을 한 건 알겠는데, 그로부터 깨닫게 된 점이 없어 진정성이 떨어짐'. 스스로도 내가 쓴 글을 쉽게 평가할 수 있었다.
자기소개서를 써보며 다시금 느꼈다. 우리는 경험만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에 대한 회고로부터 배운다. 경험했으면, 한 번씩 돌이켜보아야 한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어떤 것을 학습했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으며,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되새김질해야 하고 기록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취업을 앞두고서, 이제까지의 경험을 주욱 나열해두고 회고를 거듭해보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엇이든 배웠을 것이고, 아무리 사소한 경험일지라도 느낀 바는 있었을 것이라 믿으며.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회고로부터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