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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로 남아 내게 머물겠다면

모든 종류의 상처에 대하여

by 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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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에 손톱 길이의 흉터가 있다. 모양이 서핑보드를 닮아서 위에다 파도 타는 사람을 새겨볼까 했다.

부모님 앞에서 농담인 척 얘기해 봤는데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도 말랬다. 귀여울 것 같은데.

오른손잡이의 오른 손등이라 시선이 자주 간다. 난 이 흉터가 그리 밉지는 않다. 근데 그렇게 좋지도 않다.

작은 타투만큼의 유쾌함이 더해진다면 흉터를 사랑까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싫지도 좋지도 않은 애매한 흉보다야 사랑스러운 흉이 더 좋을 테니까. 아무래도?


흉터에 아무런 감정이 없음은, 흉터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일렁임이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어쩌다 생긴 흉터냐고 자주 묻는다.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도 참 민망하다.

일상 속의 작은 실수 그 이상의 서사는 없다.

시시하기가 그지없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신나지 않을게 뻔하다.

그래서 대충 얼버무린다. 유리에 긁혔어요, 아프진 않았어요.




굳이 어떤 종류의 실수였는지 말하자면, 미련함이다.

이빨이 살짝 나간 커피 서버를 매일 쓰고 매일 씻었다. 한두 달 내내 그랬다.

이전에도 깨먹은 서버가 여럿이었고, 또 새로 사자면 쓰게 될 돈은 8천 원에서 3만 원 사이였다.

나는 8천 원짜리를 장바구니에 담아뒀다가, 3만 원짜리 설명글을 자세히도 읽고 하트도 눌러뒀다가,

그 둘의 중간값 정도인 물건은 어떤가 고민도 했다.

'커피를 담을 유리 주전자’를 대체할 것들을 집 안에서 한두 개 찾기도 했다.

결론으로 까진 이어지지 않는 생각들이 한두 달쯤 이어져오던 어느 날 밤 손등에 맑고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커피를 담는데 하자랄게 전혀 없는, 아주 작은 조각 하나 떼어져나간 유리 주전자.

다음 주자를 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시간 동안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손을 쑥 집어넣어 매일 안쪽을 씻어줘야 하는 구조의 제품, 그 입구에 생긴 날카로운 균열은

언제든지 손바닥 손가락 혹은 손등을 예리하게 베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지만, 또 확실히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다 벌어졌다. 일도, 상처도.




이미 썰려버린 피부는 어찌할 수 없다. 이미 받은 상처는 무를 수가 없다.

벌어지는 상처는 병원에서 실로 꿰매야 한다는 상식조차 없는데 누굴 탓할 수 있을까.

덕분에 나는 새로운 살이 차오르는 과정을 모두 볼 수가 있었다.

연한 장밋빛, 주변의 것보다 더 반들거리는 살. 결이 없는 표면.

살짝만 더 깊었더라면 손등에 들어찬 퍼런색 핏줄과 인대에 닿았을지도. 최악은 아니었으니 다행일까.


얼얼한 피부밑에서 계속 피가 고여 나오던 때, 건드리기만 해도 따끔하고 아리던 날들,

통감은 사라졌으나 아슬한 기억은 계속 떠오르고,

입구가 좁은 유리컵만 보면 움츠러들던 시절이 모두 흘러갔다.

흉터 위에 무언갈 바르고 붙일 의미가 없어진 무렵에, 흉터는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아팠었지'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럴 때도 있었지' 류의 생각조차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나의 일부분.




어느 상처는 의식도 못한 사이에 생겨 하룻밤 사이에 낫고,

반면 어떤 상처는 한참을 울부짖어도 그 고통의 반틈조차 보상받지 못하지만

아무는데 반년 남짓한 시간이 걸리는 지긋지긋함을 가졌다.

딸내미가 곱게만 살아가기를 바라는 엄마 아빠는 내 손등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했다.

나는 그 비슷한 주변의 말을 귀에 담으며 그 속의 사랑을 먹었다.

상처 하나에 가지 하나 더 돋우는 식물들처럼, 그렇게 나도, 시간과 사랑을 양분 삼아, 아물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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