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어느새 멀어지고 아픈 기억만이 남았을 때
요 며칠 계속 일찍 일어났다. 일부러 기상시간을 앞당기지는 않았는데 6시 즈음만 되면 눈이 떠졌다. 여름의 한가운데에 가까워지면서 해가 더 바쁘게 떠오르는 것도, 눕는 방향을 (햇빛이 눈두덩이에 가득 차는 쪽으로) 바꾼 탓도 있겠다. 그치만 나는 절로 일러진 기상에 이유를 대자면 이런 따분한 사유들은 다 제쳐두고 단 하나만 주장하고 싶다.
나는 이제 새벽에 요가원을 다니는 사람이 될 거니까!
벅차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요가원에 처음 방문하기로 한 날은 화요일이었는데 나는 목요일부터 설레고 말았다. 밤 러닝을 나가 열심히 뛰다가도 요가원 건물을 지날 때면 괜히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서 막 상상했다. 아침의 고요한 요가원과 향냄새를. 불이라도 켜져 있다면 그리 흥미로울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변태 같다). 모든 게 맘에 들어. 눈에 띄는 핫핑크색 간판도, 작은 창문에 붙어있는 담백한 모양의 흰색 시트지들도, 아담한 빨간 벽돌 건물의 2층에 자리한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에서 나와 풍경에 넋을 놓고 흥얼흥얼 걸어도 5분이 채 안 걸리는 게. 이렇게까지 좋아할 거였으면 진작에 다닐 것을. 그치만 올해 하반기가 되어서야 요가까지 욕심 내볼 수 있는 몸으로 돌아왔는걸. 디스크 수술 이후 다운독은 커녕 앉아서 다리 앞으로 뻗는 자세조차 잘되지 않았던 1년. 이를 되짚어보자면 여름과 손잡고 무사히 돌아온 허리 건강에 감사할 뿐이다.
기다리던 화요일 아침. 날씨는 걱정될 만큼 더웠지만 하늘이 예쁘니 발도 가벼웠다. 요가원 건물로 가는 길. 달리기를 하러 갈 때도 지나고, 터벅터벅 밤늦게 귀가할 때도 스치고, 요가원 아래 단골 술집을 오가며 특히 자주 걸어온 거리. 똑같은 그 길목이 유난히 새로웠다. 어머 저 집은 마당에 나무가 참 예쁘다며. 뭔 여름 하늘이 이렇게 높냐며. 대학교 첫 강의를 들으러 가던 날도 이렇게까지 설레진 않았다. 1층에 있는 작은 출입구로 들어가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며, 반층에 붙어있는 익숙한 옥색 철문을 바라보면서는 생각 하나가 스쳤다.
어쩌면 나는 반층에 올라와 화장실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남은 반층을 항상 더 올라가 보고 싶었을지도 몰라.
몇 계단만 더 밟으면 있다는 요가원이 1년 6개월 내내 궁금했고,
내가 포만감과 취기에 해롱거릴 때 산뜻하고 가벼운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분들이 내심 부러웠던 거야.
안내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그냥 요가원 문을 설컹 열어봤다. 문 오른편에 선생님이 계셨다. 아무도 선생님이라고 알려주지는 않았으나 누가 봐도 엄연히 당연히 선생님일, 그런 사람.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주시는 매트를 받아들어 적당한 위치에 펼쳤다. 위에 앉아 전날 밤 냉침 해둔 유자 얼그레이티를 훌짝 훌짝 마셨다. 멀뚱거림이 길다 싶을 즈음부터는 속속들이 출입문이 열렸다 닫혔다. 나보다 훨씬 더 정돈된 몸짓으로 매트를 펼치는 사람들. 이후의 시간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이 수업을 듣는데 한 명 빼고 머리 서기가 되는 건 뭐람. 선생님께서 다음 시간엔 나도 머리 서기를 할 거란다.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어지는 말이었다. 월등히 정돈된 자세로 몸을 펼치고 굽히고 세우는 사람들과 기분 좋은 열등함을 느끼는 나. 무언갈 처음 배우는 시간을 좋아한다. 내가 더 나아지고 싶은 점을 발견하면, 무수히 많을 내일이 반가워진다. 욕심과 겸손 사이를 조율하는 일이 재밌다.
'이게 되나'싶은 자세를 여럿 지나고서, 누워서 머리 뒤로 다리 넘기기 동작(=쟁기자세=할라사나)을 해야 했다. 불쑥 허리를 쓰기가 부담스러워졌다. 허리 굽힘 정도에 대한 나름의 제한선을 유지하며 살아온 1년은 무시할 수 없는 세월이었다. 동작을 따라 하지 않고 있으려니 선생님은 콕 집어 물어보셨다.
상은 님, 해볼까요?
제가 허리가 안 좋아서요
아픈가요?
..네
반사적인 답변이었다. 사실 느껴지는 통증이라곤 없었다.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은 동작인데 아플 리가 있나. 했어야 했던 답은 속으로 읊었다.
아니요. 근데 아파질 것 같아서요.
수련이 끝나고 둥그렇게 모여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운동 목적 등등을 물으시기에 그때 주절 주절 상황을 설명할 수가 있었다. 디스크 수술을 했어요. 척추 몇 번 몇 번? 그건 1년 전이라 기억이 잘은 안 나지만 어떤 수술? 그게 내시경 두개로 하는 거였는데 뭐더라 아무튼 요추 쪽이었고 이후로 수영을 하면서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어쩌고 돌핀킥이 허리에 좋다고 저쩌고.. 허리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면 펼쳐놓던, 입에 익어버린 말들을 주욱 이어갔다.
다만 재밌는 점은 그날의 머리에선 새로운 생각 하나가 맴돌았다는 것인데,
아픈 감각은 이제 없다. 아주 멀다. 지나간 일이 돼버렸다. 아픈 기억만이 남았다.
도란 도란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고 마신 찻잔을 정리하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선생님은 현재 허리가 아픈 게 아니라면 일단은 자세를 만들어보자고 하셨다. 끄덕이고서 말했다.
좋아요. 저도 욕심이 있어서요. 과하지 않은 선에서 천천히 해보고 싶어요. 잘 온 것 같아요.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까지 내 등허리에서는 오랜만에 통증이 느껴졌다.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경험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픔은 뼈에서 오는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꽤 옅어진 수술 자국 밑, 요추를 감싸는 근육의 신호였다. 나는 요가를 하면서 근육을 썼다. 내 허리는 무사하다. 더 강해지고 있다. 희망적인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새로운 말을 읊어야 한다.
나는 나았다.
그리고 나는 나아가고 있다.
무수히 많을 내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