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국 사회의 아비투스 현상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였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소비 자체가 문화적 자본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은 집단적으로 비슷한 선택을 해왔다. 카페 문화가 확산되자 전국 어디서나 스타벅스를 찾는 행위는 ‘안정된 선택’으로 자리 잡았고, 자동차 소비에서 벤츠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성공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또한 프리미엄 아파트 이름은 생활수준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표식이 되었다. 이러한 집단적 소비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취향을 억압하고 교양적 소비의 성장을 제약한다.
스타벅스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스페셜티 카페가 대안으로 부상하고, 벤츠가 대중화되자 더 상위급 브랜드가 새로운 위신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집단적 기준은 항상 ‘뒤쫓는 욕망’을 낳으며, 이는 곧 소비의 피로와 불안으로 이어진다.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장(field) 속에서 자본을 가진 집단이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별짓기의 전략이다.
프랑스의 미식 문화에서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를 통해 치즈와 와인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맛의 차이를 언어로 구분하는 습관을 배운다. 이는 사회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아비투스가 세대 간 전승되는 대표적 예다. 반면 한국은 급속한 성장 속에서 집단적 소비 기준이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졌다. 개인의 취향을 세밀하게 형성할 시간이 부족했으며, 그 결과 ‘남들이 다 가는 곳’, ‘남들이 다 사는 것’이 곧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는 개인적 선택의 부족이 아니라, 문화자본이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상태에서 집단적 동조를 통한 상징적 안정이 우위를 점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소비는 단순히 생활의 충족 수단이 아니라, 불안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같은 아파트 브랜드를 고르고, ‘남들만큼은 보여야 한다’는 불안이 고가의 소비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심리는 안정적인 ‘개인의 만족’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소비를 선택하게 만들고, 그 결과 과잉 소비와 부채, 그리고 끊임없는 비교 심리를 강화한다. 결국 소비는 행복을 주기보다, 새로운 불안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된다.
프랑스에서는 미식과 패션, 예술이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생활 속 교양으로 자리 잡아 있다. 와인 한 잔을 마실 때도 ‘산미가 어떤지, 어떤 치즈와 조화를 이루는지’를 논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교육되고 전승된다. 이는 곧 ‘감각의 언어화’를 통해 개인의 취향이 세밀하게 다듬어지는 과정이다.
반면 한국은 ‘빠른 경제 성장과 집단적 동조’라는 맥락 속에서 개별 취향보다는 집단적 안도감이 우선되었다. 그 결과, 소비의 언어와 경험이 축적되기보다 획일화된 브랜드 중심의 소비가 문화로 자리 잡았다. 즉, 프랑스의 아비투스가 교양적 취향의 전승이라면, 한국의 아비투스는 불안의 해소와 집단적 동조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