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 카페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커피가 맛있는 카페 4
“커피가 맛있는 카페 좀 추천해주세요.”
요즘 자주 듣는 질문이다. 그럴 만도 하지. 우리는 사진관인지 카페인지 헷갈리는 곳을 얼마나 많이 경험해 왔던가.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카페의 본질인데 말이다. 다양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카페가 넘쳐나는-제주에 카페가 약 1,000여 개로 인구 대비 전국 최고-요즘, “우린 사진 찍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그저 맛있는 커피가 필요할 뿐이에요”라는 귀여운 변명(?)이 종종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동네엔 커피가 맛있는 곳이 많다. 아마도 거주 인구가 많아서겠지. 로컬은 내일도 이곳을 지나지만 관광객은 내일이면 육지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손님을 다시 오게 하려면 바다 뷰보다는 커피 맛이 중요함은 자명한 일이다. 휴일 오후, 한두 시간 보내기에 부족함 없는 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서보자. 맛있는 커피가 기다리나니.
소개에 앞서 일러두자면, 나는 스벅 커피와 백다방 커피를 구분 못할 정도의 미각 파괴자가 아니며 커피콩 원산지에 따른 맛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할 정도의 절대미각의 소유자도 아니다. 딱 그 중간쯤 어딘가에 내 미각이 있을 텐데, 그보다는 오히려 커피를 둘러싼 모든 ‘콘텍스트'에 좀 더 예민한 편이고 다양한 요소들의 합이 만족스러웠을 때. ‘아 맛있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냥 그렇다고.
01. 오삼커피바
사장님이 텐덕후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5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하나.. 둘... 셋! 3초면 사장님이 노란색 덕후라는 사실을, 3분이면 장비 덕후라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냉장고 문짝까지 노란색이라니, 미생물을 관찰해야 할 것만 같은 현미경스런 그라인더는 또 뭐람. 아무튼 어지간히 재미난 사람이다.
O3은 office of day off의 줄임말이다. 쉬는 날 와서 여유롭게 커피 맛에 집중하며 즐기라는 의미겠지. 아무튼 고작 6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작은 Bar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면 커피 요리(?)가 시작된다. 좁고 조용한 공간이라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사장님을 바라보게 된다. 커피 한잔을 내리는데 약 10분 여가 걸리는데 마치 한 편의 극을 보는 것 같다. 커피를 내리는데 필요한 동작을 태권도 품새처럼 노란 종이에 그려뒀을 것 같다. 보는 재미가 있다.
시간을 좀 넉넉히 두고 가보면 좋다. 8종 정도의 커피 메뉴가 있는데, 원두마다의 추출방법과 기구가 달라 이것저것 주문해서 관람하고 맛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정성에 비해 커피값도 저렴한 편이다. 파인 다이닝 카페 같달까. 정성스레 잘 내어진 커피를 하나하나 음미하며 마시다 보면 1시간이 금방이다.
02. 카페단단
웃는 듯한 카페 외관이 사랑스럽다. 오래된 주택을 사장님이 한 땀 한 땀 DIY로 리모델링하여 공간 곳곳에 주인장의 섬세한 취향이 진하게 배어있다. 참 살뜰하시다. 화장실 세면대에 휴지가 아니라 손수건이 놓여있을 정도면 뭐 말 다했지. 아이고 사장님마저 훈훈하시네. 아.. 사장님이 훈훈해서 공간이 그런 거겠지.
바 옆의 구석에 좌석이 하나 놓여있는데, ‘이곳은 사장님의 쉬는 곳인가요?”라고 물으니 “손님들이 책 읽는 곳이에요.”라 말하신다. 책을 읽기엔 좀 거시기(?) 해 보여 의아했건만 갈 때마다 누군가 거기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글을 본 누가 그곳에서 책을 읽은 후기를 내게 좀 들려주시면 고맙겠다. 그것이 알고 싶다.
나는 주로 노트북을 들고 일을 하러 단단을 찾곤 한다. 좁은 공간임에도 사람 간의 눈치를 보는 삭막함이 없고 오래 머물러도 편안하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일수록 호스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카페단단, 섬세하고 따뜻한 사장님을 똑 닮은 공간이다.
03. 프로파간다
시크하달까. 간판도 없고 의자가 그리 편하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나는 그런 곳 있잖아(갑자기 반말해서 미안합니다. 그래야 글맛이 나서). 더운 어느 날 카카오 맵 찍어 구비구비 찾아가느라 뽀송하던 티셔츠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짜증이 맺히며... 카페 문을 열였다. 극도로 정돈되어 있는 공간과 커피 향을 마주하자마자 울퉁불퉁하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사람 마음이란 참.
“에티오피아, 아이스로 주세요"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온갖 꽃향과 과일향이 입안에 가득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와, 엄청 맛있어!’라고 속으로 몇 번을 외쳤다. 입 밖으로 내면 문밖으로 나가야 될 것 같아서.
프로파간다. 반어적 표현이 아닐까. 무엇하나 알리려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은 곳. 몇 주째 책장이 넘어가지 않아 마음이 무거운 책 한 권 옆에 끼고 오후께 들러보자.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다 식어버린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마저 맛있을 것이다
04. 커피 동굴
커피 맛도 공간도 사장님의 말소리도 동굴처럼 묵직한 곳. 통돌이 로스터라고 들어는 보았는가. 말 그대로 통에 원두를 넣고 직접 돌려가며 버너 불에 콩을 볶는 것을 말한다. 한입 머금으면 입안에 묵직~함이 돌고 이내 원두 본연의 온갖 향들이 피어난다. 수천, 수억짜리 로스터기 안 부럽다.
“여행 오셨나 봐요?”. 사장님의 질문에 커피 맛이 한층 더 묵직해진다. 예전에 어느 스크린에서 봤을법한 젠틀한 중년 배우의 목소리다. 왠열 음악도, 연기도 한 적이 없으시단다(아니, 하셨어야 해요!!!). 세상 스윗 하기까지 하신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열정과 커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느껴진다. 모든 디저트를 직접 만들어 내주시니 꼭 함께 먹어보자.
페친이신 사장님의 활동과 이야기를 종종 보곤 한다. 제주를 정말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또한 커피를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고 계신다.
당신이 자주 방문하는 카페를 떠올려보라. 편안하거나 맛있거나. 카페라는 공간의 본질이 그런 것 아닐까. 거기에 바다 뷰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공간이라면 두 잔 값에 한 잔을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 맛이란 모름지기 취향이라 맛있음과 없음의 절대적 기준이 없으니 내가 맛있으면 맛있는 카페인 것을.
내가 ‘맛있다'라고 여기는 데에 있어 절대적 요소는 ‘커피’를 대하는 주인장의 태도이다. 그가 자신의 공간을, 커피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카페에 들어서면 금세 가늠할 수 있다. 그에게 즐겁고 소중한 ‘커피 한 잔'이라야 내게도 의미 있는 ‘한 잔'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커피를 음미하며 커피 그 너머에 있는 주인장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예술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진, 글, 편집 : 이광석
제주에서 살고 베드라디오 호스텔을 운영합니다. 유명 관광지보다는 로컬의 일상을 여행하고픈 분들에게 추천하는 곳들을 글로 써 내려갑니다. 이 글은 호스텔 베드라디오의 공식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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