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공간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주 간판 맛집 3
당최 무엇을 파는 곳인지 짐작도 못할뿐더러 아예 혼란을 부추기는 듯한 가게들이 있다. 바로 옛 간판을 그대로 두고 간판과는 관련 없는 것을 파는 곳들이다. 을지로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제주에서는 아직은 낯선 유행이다. 이런 대담한 간판을 단 가게의 주인장이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이런 것이리라.
“누구나 올 수 있지만 아무나 오진 마쇼"
우린 누구나이지만 아무나이긴 싫으니까, 지금부터 문을 스르륵 열고 들어가 가게의 사정을 들어보자.
01. 제주침시술소
이곳은 소바집이다. 구제주를 오랜 시간 지켜오던 ‘제주침시술소’가 가진 잠재력(?)을 알아차린 사장님이 침 할아버지를 삼고, 아니 오고초려하여 설득한 끝에 가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침시술소’라는 공간이 인테리어요, 간판 자체가 브랜드이자 강력한 마케팅 포인트이다. 이곳에서 감귤 모양, 현무암 모양, 이모양저모양 제주 기념품을 팔았다면 어우, 다행이다... 사장님이 소바를 만들 줄 알아서.
이곳에서는 소바와 유부초밥 딱 두 가지만 판매한다. 일식 요리를 오랫동안 하신 사장님이 직접 소바 육수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메뉴 구성만큼이나 맛도 슴슴하니 아주 깔끔지다.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은 5분이면 소바가 담겨 있던 그릇의 바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주시청 부근에 있어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우르르 나와 줄을 서곤 하는 곳이니 요리조리 잘 피해서 가보도록 하자.
02. 남원식당
식당 이름이야 뭐 요즘도 흔히 볼 수 있을법한 이름이니 그렇다 치고, 간판 한쪽 귀퉁이를 차지한 전복뚝배기의 존재감이 남다른 이곳은 베트남 쌀국수 가게이다. 예상컨데 전복뚝배기가 없었다면 이 가게를 찾는 손님은 지금보다 분명 적었을 것이다. 모두가 이 장면을 찍고 있으니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에 전복 뚝배기는 없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마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 베트남인데?’ 과연 흉내내기가 아니라 레알 진또배기 비엣남 스타일이다. 키치함으로 설명되지 않는 동남아 특유의 매력적인 촌스러움이 가득하다.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보이는데 주방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분과 서빙을 하는 따님이 베트남인이다. 그렇다면 또 맛이 기대가 되지 아니하겠는가.
알고 가자. 남원식당의 쌀국수는 우리가 흔히 먹는 베트남 쌀국수와는 다르다. 쌀국수도 지역마다 요리법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가 주로 먹는 담백하고 구수한 쌀국수는 ‘포'라고 하여 북부 하노이 지역의 음식이고 남원식당의 쌀국수는 ‘분’이라 하여 중부 후에(Hue) 지역에서 먹는 방식이다. 특징이라면 국물이 빨갛고 맛은 약간의 달짝지근함이 있다. 양념장에 고수 팍팍 넣어 국물을 들이켜면 이곳은 제주시 베트남동이다. 아. 꼭 반미와 함께 먹길 추천한다. 너무 맛있거든!
03. 수화식당
다행히 이 가게엔 진짜 이름(간판)이 옛 간판 옆에 나란히 붙어있다. 옛 식당을 재생하여 만들어진 책방이다. 이름은 미래책방. 아이러니하지. 과거의 공간에 미래의 이름이 달린 백투더퓨처같은 매력.
미래책방은 제주 동네책방의 맏언니 격이다. 지금은 제주에만 100여 곳이 넘는 동네책방들이 성업 중이지만 그땐 여행자들이 책방을 찾아다니던 시기도 아니어서 그저 손에 꼽는 정도의 가게들만 운영되고 있었다.
인테리어를 전공한 사장님이 직접 뜯어고쳐 만들어진 책방 공간에는 그녀의 취향이 잔뜩 묻어있다. 책의 큐레이션으로 보건대 페미니즘, 채식, 제주에 깊은 관심사가 있으리라. “나는 동물 착취에 반대한다”라는 문구가 걸린 왼편으로 동물복지에 관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책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고 있으니 단순히 가게를 운영하는 것을 넘어서 ‘예술’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바야흐로 취향의 시대이다. 무의미한 간판은 손님과 주인장 사이의 ‘코드'를 확인하는 기재일 터, 오랜 간판을-그것의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그대로 두는 이유는 내 공간에 이왕이면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 왔으면 하는 사장님의 바람도 있으리라.
위 가게들은 옛 간판을 그대로 쓴다는 것 외에도 공통점이 있다. 본질에 충실하다는 것. 음식점은 맛있고 책방은 구매하고 싶을 만한 좋은 책들을 제안한다. 르네 마그리트가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은 작품처럼, 보이는 것과 의미하는 것의 다름을 통해 우리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곤 한다. ‘간판을 그대로 두겠어.’라는 결심을 하며, 그들은 아마도 본인의 의도를 알아봐 주는 손님들이 가게 문을 스르륵 열고 들어왔으면 하지 않았을까.
사진, 글, 편집 : 이광석
제주에서 살고 베드라디오 호스텔을 운영합니다. 유명 관광지보다는 로컬의 일상을 여행하고픈 분들에게 추천하는 곳들을 글로 써 내려갑니다. 이 글은 호스텔 베드라디오의 공식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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