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르코 Jun 19. 2020

뉴트로가 된 레트로

재생공간 덕후들을 위한 구제주 뉴트로 스팟 4

구제주에서는 누구나 시간여행자가 된다. 짧게는 수 십 년, 길게는 수 백 년 전의 흔적들이 일상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4.3 사건의 기억이 채 아물지 않은 길에는 연신 렌터카들이 달리며, 광해군이 유배 오며 걸었을 길에는 점심을 먹기 위한 직장인들의 발길이 오간다. 이렇듯 오래된 도시의 삶은 불현듯 나를, 역사의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는다.


어딜 가나 센스만점, 감각만랩의 힙쟁이들이 있다. 게다가 한국인이 가장 살고 싶은 도시 1위 제주인데 오죽할까. 이들에게 국사책 같은 구제주는 그야말로 보물창고다. 낡고 버려진 공간에 터를 잡고 때 빼고 광을 낸다. 그리곤 급기야 세상에 하나뿐인 ‘멋'을 창조한다. 오래된 도시에서 창조된 새로움, 끼쟁이 힙쟁이들의 제'멋'대로인 공간을 따라가 보자.    



01. 순아커피

적산가옥(일본인 소유의 집, 적의 재산)은 그 자체로 도시의 기념관이다. 무너뜨리는 대신에 보존하고, 그대로 두는 대신에 알맞은 활용을 찾는다면 건물에 아로새겨진 역사는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무거운 마음 내려놓고 100년 전 지어진 일본식 건물에서 피어나는 커피 향을 음미하러 가보자.

순아커피. 이 곳에 사신 큰 어머니의 이름인 ‘순아'를 커피 앞에 두었다. 그대로 두다. 뉴트로 탄생의 공식 아닐까. 외관부터 남다르더니 내부는 더욱 입이 떡 벌어진다. 2층을 향하는 좁디좁은 나무계단을 오르면 일본식 다다미 방이 나온다. 걸을 때마다 마룻바닥이 삐걱삐걱 대니 즐겁다. 층간소음의 역설. 관덕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으면 순아 할머니의 조카이신 주인장이 커피를 들고 찾아오신다.

어떤 커피가 당신에게 특별한가. 100년간 이 곳을 드나든 사람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곳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는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02. 구석카메라

원래는 미래책방의 ‘구석'에 있었다. 그러다가 구석구석 청소할 카메라-실제로 가게 이름의 의미이기도 하다-가 너무 많았던 걸까. 바로 옆(?) 가게로 자리를 옮겨 이제는 어엿한 간판을 달고 영업 중이다. 왠지 이런 동네엔 필름 카메라 샵이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다행히(?) 구석 카메라가 있어 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필름 카메라를 수리, 판매, 대여, 그리고 현상 서비스까지 한다.  

이쯤에서 공식이 등장. 한일 슈퍼 간판을 그대로 두었다. 입구의 스테인리스 문을 드르륵 거리며 열 때마다, 십 수년 전 동네 꼬맹이들이 설렘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가게 문을 열었을 것이다.

얼핏 보아도 무엇하나 뽐낼 생각이 없다. ‘그냥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카메라를 두면 그만이야.’라는 듯, 있던 것에 쓰던 것을 두었다. 손 때 묻은 것들의 가치는 누군가 그것을 귀하게 여긴 순간들이 이어져 왔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드르륵 문도 찰칵대는 카메라도 그렇다.



03. 비스트로 더반

제주의 자연은 늘 감동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가끔은 도시의 삶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 비스트로 더반을 찾곤 한다. 제주의 해방촌 같달까, 오래된 공간이 주는 아우라와 주인장의 진득한 취향의 합이 딱 맞아떨어질 때의 레트로는 극도로 세련되다.

‘사장님 어디서 오셨어요?’

공간의 팔 할은 주인장이라, 왠지 십수 년간 세계 여행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제주일 것만 같아 물었다.

“이 동네 토박이예요.”

촤핫. 편견일랑 고이 접어 클린하우스에 갖다 버리고 공간을 채우는 오브제들의 매력에 빠져보자. 어디서 이런 걸 구했을까 싶은 것들이 오래된 가정집의 거실을 빼곡히 채운다. 크지 않은 가게에 유난히 큰 스피커는 DJ파티를 즐기기 위함이라니. 이곳에서 가끔 열리는 이상순 씨의 디제잉은 이미 유명하다.

무국적 요리를 지향하는 곳이다. 타코 라이스, 팟타이, 커리 등등 그야말로 요리로 세계 여행이다. 곁들여 와인, 맥주, 간단한 칵테일을 마실 수 있으니 구제주에 숙소를 잡았다면 운전대 내려놓고 이곳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낭만을 만끽해보자.  



04. 리듬 앤 브루스

‘관덕정 패밀리’라 부르는 조직(?)이 있다. 관덕정 부근의 작은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 카페, 음식점, 타투샵, 금속공방, 퍼퓸 샵 등을 운영하는 이들의 모임을 일컫는다. 몰려다니며 동네 술집들을 뿌시기도(?) 하고 그들의 가게에서 디제이를 불러 밤새 춤을 추기도 하며 달에 한 번은 착한 플리마켓을 열기도 한다. (내가 보기엔)이 구역 찐 힙스터는 관덕정 패밀리다.

쌀다방 사장님을 중심으로 헤쳐 모여 매력적인 공간을 열었으니, 장안의 화제 리듬 앤 브루스(Rhythm and Brews)다. 쓸모를 다한 동네 목욕탕, 태평탕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 2층은 라이프스타일 샵으로 재탄생시켰다.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 하니 그런 재주는 어디서 득템 하신 걸까.

쌀다방의 시그니쳐 쌀 라테와 매일 구워내는 요런 저런 과자의 맛은 명불허전이다. 웬만큼 수다를 떨었다면 2층을 방문해보자. 금속 주얼리, 향 제품, 빈티지 램프, 실크스크린 패브릭 등 관덕정 패밀리의 고퀄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만날 수 있다. 당신의 서랍에 꺼내보지 않은 기념품이 쌓여있다면 이번에는 이곳에서 지갑을 여시길 추천한다. 오랫동안 쓸모 있는 것들이니 말이다.

아. 주인장의 사랑스러운 반려견들이 뛰노는 곳이니 귀여워할 준비 단단히 하고 방문해보자.   



우리가 ‘힙하다’라고 표현하는 곳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공간에 있는 것들을 없애거나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오히려 새로워진 것이다. 오래된 기억에 대한 존중은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사진, 글, 편집 : 이광석
제주에서 살고 베드라디오 호스텔을 운영합니다. 유명 관광지보다는 로컬의 일상을 여행하고픈 분들에게 추천하는 곳들을 글로 써 내려갑니다. 이 글은 호스텔 베드라디오의 공식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도 게재됩니다.

베드라디오 인스타그램 가기
베드라디오 블로그 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