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사라봉 산책
근래 두 주간, 제주 날씨는 매우 런던스러웠다. 이른 장마라 내내 우중충하거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곤 했다. 최근 동네를 돌아다니며 여행자들에게 소개할 로컬의 일상을 취재 중인데 이번 주 ‘사라봉의 일몰'을 소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마침 장마기간과 겹쳐 취재를 기한 내 못할까 내내 안절부절이었다.
아. 이제 진짜 써야 하는데.. 날짜가 거의 임박한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갈 때까지만 해도 흐렸던 날씨가 밥을 먹고 나오니 새파래졌다. 와, 날씨 요정이라도 다녀 간 걸까. 하늘이 정말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오예, 오늘의 일몰시간을 확인하니 19시 47분. 한 시간 전 출발!
올레길 18코스(사라봉을 둘러가는 코스)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짝짝짝, 앞뒤로 손뼉 치며 걷는 어르신들이 나타난다. 익숙한 풍경인데 익숙지 않다. 왜냐하면 여긴 제주의 ‘오름’이니까 말이다. 그렇다. 사라봉은 로컬들의 일상에 가장 가까운 오름이다. 서울 싸람들이 한강 둔치 가 듯,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라봉을 오른다. 올레길과 오름이 우리 동네 공원인 셈이다. 1만 년 전에 만들어진 공원(멋있어…).
사라봉 공원에서 정상으로 가기 전, 잠시 절에 들러 소소한(?)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제주는 절에도 야자수가 있는데 이 장면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리고 절에서 이런 뷰가 나오면 어쩌란건지. 휴
1916년 첫 불을 밝혔다고 한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은 자리에서 제주를 찾는, 떠나는 배들의 눈이 되어주는 일,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감정의 요동 속에 사는 나의 눈에는 등대야말로 장인이요, 성인이다. 등대의 눈은, 100년 전 제주 성곽의 돌을 허물어 건입 포구 앞바다를 매립하던 일본군의 만행을 보았겠다. 50여 년 전 제주에 감귤 산업이 막 태동하던 때, 일자리를 찾아 제주에 첫발을 내딛던 육지 노동자의 애환도 보았겠다. 요즘은 매일, 바다 위를 여행하는 크루즈에 탄 전 세계 여행자의 설렘도 볼 것이다. 한 곳을 응시하는 등대의 눈은 가장 오랜 기억을 담고 있다.
1시간이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정상에는 팔각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 오르면 360도 파노라마 뷰를 감상할 수 있다. 제주항, 제주공항, 제주시내, 제주바다까지 한번에 관람이 가능하다.
사라봉의 기생화산이라 이름이 별도봉. 제주 사람들의 네이밍 법은 야구로 치면 직구다. 사라봉 산책로 코스를 돌고 내려오면 바로 별도봉 장수 산책로의 입구가 나온다. 136m로 높지 않은 오름이지만 풍광만큼은 압도적이다. 등성이가 바다 쪽으로 뻗은 벼랑, 속칭 자살바위라 부르는 기암절벽이 장관이다. 장수 산책로인데 왜 바위 이름은 또 자살 바위란 말인가. 역시 직구다. 하루종일 여행하느라 체력이 조금 달리는 분들은 올라갈 때는 정상 코스로 내려올 때는 별도봉 산책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을 추천한다.
19시 40분, 이 순간을 위해 올랐건만 웬일인지 저 멀리 바다에 안개가 껴있었다. 이 상태라면 멋들어진 일몰을 촬영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역시 제주의 날씨는 참으로 버라이어티 하지. 아쉬운 마음 뒤로하고 터덜터덜 내려가는데 (사라)봉토끼가 예쁘게 앉아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아랑곳 않고 식사에 여념이 없는 토끼가 예뻐 한참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금세 좋아져서-나란 인간 쉬워 참-다시 내려가는데 숨이 턱 막힐 만큼 아름다운 낙조가 눈 앞에 펼쳐졌다.
사진은 장면의 순간에 머무르지만 삶은 순간의 누적이다. 중요한 건 장면이 아니라 장면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아닐까. 삶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내게 달려있다.
사진, 글, 편집 : 이광석
제주에서 살고 베드라디오 호스텔을 운영합니다. 유명 관광지보다는 로컬의 일상을 여행하고픈 분들에게 추천하는 곳들을 글로 써 내려갑니다. 이 글은 호스텔 베드라디오의 공식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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