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의 쓸모
자전거로 제주를 종주하기로 했다.
자전거는 길게 타봐야 1시간 정도 타본 게 전부라 234km의 장거리 라이딩은 내겐 큰 도전이었다. 자전거 동호회 카페를 돌아다니며 공부를 했다. 하루에 몇 km를 타야 하는지, 준비해야 하는 장비는 뭐가 있는지, 구간별 주의사항은 뭐가 있는지.. 이런저런 정보들을 모았다. 최소한의 장비를 구매하고 디데이를 정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체력'을 키우기 위해 출퇴근을 자전거로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과 회사의 고도차는 250m 정도다. 40분 내내 심각한 오르막 길이니, 도전을 위한 또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약 3주간의 준비를 마치고, 비가 세차게 내리던 여름날에 234km의 여정을 떠났다. 첫째 날은 비에 쫄딱 젖었고, 둘째 날은 땀에 흠뻑 젖었다. 셋째 날은, 그제야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제주를 감싼 바다 곁에서 3일간 열심히 달렸고 무사히 첫 장거리 라이딩을 마쳤다.
자전거 종주를 결심한 날은 창업 이후 가장 앞이 캄캄한 시점이었다. 별안간 찾아온 위기가 아니라 연초부터 이어진 위기들이 누적되어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함께 일하던 분들과 이별해야 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극단의 결정조차도 궁여지책일 뿐이라 위기상황을 타계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아프고 답답한 심경으로 퇴근하던 어느 날, 11년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앞에서 내가 내린 결정은 뜻밖에도 '자전거 종주'였다.
장기전을 준비해야 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한 사람의 역량이나 천재일우의 기회로 전세가 역전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오로지 '하던 일을 계속해나가는 것'만이 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긴 호흡으로 묵묵히 걸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하다.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한 상태라야 외부의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혜로운 결정들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덜컥 겁이 나고 굉장한 도전이라 여겼던 '234km 제주 종주'는 매 시간 동안 묵묵히 페달을 돌리는 일을 3일간 반복하는 것만으로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물론 매 시간마다 만나는 크고 작은 난관들이 있지만 지난 3주간의 준비로 인해 큰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처음 가졌던 두려움에 비하면 약간은 싱겁게(?) 끝이났다. 준비하는 내내 '234km'라는 목표는 나를 압박하기도 하고 때론 희망을 품게도 했지만, 달리는 동안은 234km를 해내야 한다는 목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페달을 돌리는 일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234km를 다 돌기 위해서는 하루에 80km를 타면 될 일이었다. 하루에 80km를 타기 위해서는 한 시간에 15km를 타면 될 일이었다. 한 시간에 15km를 타기 위해서는 그저 페달을 돌리면 될 일이다.
새로운 세상, 아마도 장거리를 달려야 할 것 같다. 처음엔 두려울 것이고, 그다음엔 힘이 들 것이고, 이내 곧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해야할 할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목표지점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균형의 쓸모, 이광석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서울에서 아트테크 벤쳐회사를 창업하여 6년간 전세계 뮤지엄들과 IT기반의 전시콘텐츠 및 공간을 만드는 일을 했다. 5년전부터는 제주에서 콘텐츠/숙박/F&B가 결합된 부동산 비즈니스를 기획하고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