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공간의 감각

에드워드 홀의 <숨겨진 차원>을 읽고

by 르코

비행기에 타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클래식 음악을 틀고 눈을 감았다. 개인 공간이 급격히 좁아진 것을 만회하고자 넓은 공간감을 가진 음악을 튼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여 이태원역의 출구를 빠져나오자 코로나로 인해 한산한 거리와 낯선 건물의 입면이 눈에 들어와 이어폰을 다시 뺐다. 흥미가 일어-조금 일찍 도착하기도 했고-리움 미술관 주변으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제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건물의 질감들이 신기해 영하 10도의 낯선 추위에도 일일이 손을 대 보기도 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골목의 고도 차는 매번 새로운 시야를 보여준다. 한참을 일정한 아스팔트 길을 걷다가 약속 장소인 브런치 카페로 들어섰는데 발바닥에 감각이 쏠렸다. 매끈한 바닥에 아주 작은 자갈(?)이 박혀있었다.


1916년 영국의 제임스 섬에 너덧마리의 시카 사슴을 방목했다. 약 40년간 300마리까지 자연 번식을 하다가 2년 만에 190마리가 대량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크리스천은 살아있는 사슴과 죽은 사슴의 일부 세포조직을 떼어내 연구를 했는데, 죽은 사슴의 경우 체중은 46% 부신의 무게는 81% 감소했음을 알아냈다. <과밀, 스트레스, 자연선택>의 심포지엄에서 크리스천은 제임스 섬 사슴의 대량 사망은 ‘장기간에 걸쳐 부신이 과민하게 활동한 결과 심각한 신진대사의 혼란에 의한 쇼크’가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중세시대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2/3가 사망했고 2021년 현재 코로나로 인해 사망한 전 세계 인구는 200만 명을 넘어선다. 두 비극 모두 직접적 원인은 바이러스에 의한 사망이지만 과밀한 생활환경에서 저하된 저항력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자연선택이라면 더 오싹해지기도.


적합한 공간 사용에 대한 인간의 느낌은 매우 뿌리 깊으며 그러한 인식은 궁극적으로 생존 및 건전한 정신과 직결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제주라는 밀도가 매우 낮은 환경에서 살다가 비행기, 지하철, 대도시라는 과밀한 환경에 놓였을 때 내가 했던 저항 반응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도시화된 공간은 개인 간의 거리를 좁힐 뿐 아니라 자동화, 효율화된 건축환경으로 인해 인간의 다양한 감각을 무뎌지게 만든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
- 윈스턴 처칠


저자는 감각 세계가 공간을 구조화하고 사용하는 방식의 개념을 프록세믹스라 정의한다. 기층문화적, 전문 화적, 미시 문화적 관점의 분류를 통해 인간의 공간 사용에 ‘숨겨진 차원’을 밝혀내고 건축 환경에 적용할 것을 당부한다. 저자의 연구 결과 중, 우리가 흔히 알고 적용하는 것이 <비공식적 공간>이다. 밀접, 개인, 사회, 공적인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밀접한 거리는 15~45cm로 후각과 방사열을 느끼게 되는 거리다.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위로해주고 보호해주는 등, 연인과 같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서만 허용되는 거리이다. 개인적 거리는 45~120cm. 서로의 팔을 뻗어 닿지 않는 거리로 신체적 지배의 한계가 일어난다. 주로 친구나 가족에게 허용되는 거리이다. 사회적 거리는 120~360cm이다. 우리가 회사에서 흔히 경험하는 거리이다. 동료나 상사와의 대화에서 유지되며, 개인 업무공간의 최소한의 확보 거리가 된다. 공적 거리는 360cm 이상으로 대통령이나 주요 연사의 주변으로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거리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는 눈에 보이는 공간에 의한 감각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도 무수한 감각이, 문화적 경험으로 인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서울 상경의 이야기를 해보자. 도시의 과밀한 환경이 주는 불쾌함도 있으나 특정한 공간에서 느끼는 공간 감각은 나로 하여금, 역시 서울을 종종 와야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정확히는 우사단로나 한남동과 같은 동네를 지칭한 것이다. 지하철과 같은 건축환경은 이동의 효율을 위해 애써 참아내야만 하는 삭제의 공간이다. 일률적인 공간의 경험은 감각을 무뎌지게 한다. 나아가 빡빡한 의자 배치나 싸구려 재질을 사용한 질 낮은 공간에 익숙해지면 감각을 아예 느끼지 않기 위해 높은 수준의 청각 자극을 통해 시각적 착시를 일으키는 노력을 할 정도로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나의 경우처럼 공간 감각을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감각은 자연스럽게 불편함을 느끼며 극단적으로는 제임스 섬의 사슴처럼 ‘배제’의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