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불교는 왜 진실인가]를 읽고
10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와 2천 년 전 붓다와 150년 전 찰스다윈이 오늘 스타벅스에서 만났다면 붓다는 인간이 만든 환영이 거의 없는 호모사피엔스의 삶을 부러워했을 것이고 그러한 환영을 통해 번뇌를 느끼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밝혀낸 다윈에게는 고마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윈은 2천 년도 전에 인간이 고통의 삶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을 완화하는 해결책마저 제시한 붓다를 감탄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책의 제목이 주는 ‘느낌’과 달리 이 책은 전혀 (종교적 의미의) 불교적이지 않다. 사회생물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마음챙김 명상을 통해 경험한 것들을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득력있게 설명한다.
외부 환경을 감각기관을 통해 ‘판단’하려는 인간의 습성은 진화의 과정에서 유전자에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그래야 유전자가 살아남아서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은 외부에서 오는 위협으로부터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작동 기제이기 때문에 불안, 불만족, 혐오 등의 불편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동반할 수밖에 없다. 유전자는 오로지 복제를 위해 진화할 뿐, 인간이 느끼는 불안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다행히도) 2천 년 전, 인간이 처한 곤경의 근본 원인을 파헤치고 이를 대처하는 법을 가르쳐 준 이가 있었다. 붓다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붓다는 모든 고통이 여기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명상을 통해 다소 역설적이지만 ‘무아’를 수행함으로써 고통을 느끼는 ‘나’가 없는 상태에 이르고자 했다. 유전자 입장에서 붓다는 매우 성가신 존재로써 반역자에 가깝다.
인간의 심리를, 심리학의 사고 실험과 같은 도구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자연선택설을 근거로 설명하기 때문에 명쾌하고 쉽다. 뭐야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였어?라는 생각에 조금 홀가분한 기분마저 든다. 나아가 책의 후반부에서 불교의 진리성을 자연선택설을 통해 설명하려는 약간의 노력이 있는데 이는 억지스러움이 있다. 불교는 ‘인간(나)’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자연선택설은 그저 생물학적 동물의 한 종으로써 인간을 대할 뿐이기 때문이다. 집단의 층위가 달라 붓다와 다윈의 관점에서 정합성을 따지기에는 무리가 있다.
단순히 경험적 사실을 통해 ‘명상하면 좋아!’라고 권하는 경우에는 전혀 와닿지 않거나 일종의 거부감(진화적으로 그러해 마땅하다)마저 들지만 이 책은 과학이라는 렌즈로 마음챙김 명상을 설명하고 있어, 책을 다 읽은 후 명상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만 남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