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는 연습
갑자기 친구가 삭발을 하고 나타나면 '군대 가냐?', '실연당했냐?', '뭔 일 있냐?'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삭발은 변화, 의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데 주로 군대, 실연 등의 자의반 타의반에 따르는 무언가 큰일이 원인이 되곤 했다. 원빈이 영화 아저씨에서 고급진 삭발식을 보여준 덕분에 조금은 로맨틱한 이미지가 새로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남자는 원빈이거나 아니거나 이므로 친구에게 로맨틱하다거나 멋지다는 말을 듣긴 힘들다.
얼마 전 삭발을 했다. 한 달여를 지내는 동안 나는 위의 질문들을 무수히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다. 더불어 '회사 망했어?'라는 질문까지... (회사 안 망했습니다.) 왜 삭발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다 보니 그 대답을 모아모아 여기다가 좀 쓰려한다.
10월 18일 일요일 저녁, 한주를 마무리하고자 혼자 조용히 책을 펼쳐 들었다. 회사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책 읽기라 그리 유유자적, 한가로운 모양새는 아니었다. 내가 꽤나, 아니 엄청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토니 셰이의 <딜리버링 해피니스>를 읽고 있었다. 1/3쯤 읽고서 잠시 물을 한잔 하고 와서는 다시 책을 들었는데, 커버 뒷면의 프로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의 토니 셰이의 모습이 왠지 멋져 보였다. 이 사람은 타이완계 미국인이라 역시나 원빈은 아니다.
'나도 밀어야겠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 결심이 서는데는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냥 따라하고 싶었다. 바리캉을 들고 거울 앞에 서니 그제야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왔다. 예전 삭발을 해본 적이 있던 터라, 내가 얼마나 못생겨 질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업무 미팅 가서 이미지가 안 좋아질 거야', '겨울이 오는데 춥지 않을까', '어머니가 괜한 걱정하실 거야'등등.... 온갖 삭발을 해선 안 되는 이유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망설이는 내가 한심해질 때쯤, 과감히 바리캉을 머리에 댔다.
거울 앞에 서니 역시나 못 봐주겠다. 후회가 찾아오기 전에 서둘러 겉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을 마주치며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30분간 동네를 산책하는데 사람들과 지나칠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의 외모에서 머리(카락)는 굉장히 중요하다. 소위 말하는 머리빨이 있어야 외모의 부족함을 상쇄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 손질에 비용과 시간을 남들에 비해 꽤나 많이 투자하는 편이다. 심지어 머리 손질을 하지 않으면 근처 슈퍼마켓을 제외하곤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다. 그런 머리를 잘라내고 굳이 내 손으로 '못생김 추가요' 하는 일은 나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제 내 머리는 추워졌고 나는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두꺼운 안경으로 약간의 꼼수를 부리긴 했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모양새는 아니다. 그렇다고 내 삶이 추해 지거나 불편 해진 건 없다. 아침에 출근 준비 시간이 20분 단축되었고, 머리단장에 들이는 돈이 꽤나 많이 절약되고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머리가 이렇다 보니 외모에 그리 신경 쓰지도 않고 남들 시선도 덜 의식하게 되었다. 돈도 감정도 낭비가 줄었다. 대단하다 생각하는 일이 실제 해보면 그리 대단치 않다.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두렵다. 해보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좀 더 노력하면 새로운 즐거움 까지 발견하게 된다. 몇 년 전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 친구가 나에게 '너는 이제 고기를 못 먹어서 어쩌냐, 먹을게 별로 없겠다''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하다 내가 말하길. "먹던걸 못 먹게 된 거 보다 안 먹던걸 먹게 된 게 더 많아"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고기로 살던 내가 그 이후에 야채와 나물의 맛을 알게 되었고, 그런 재료로 만든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맛에 눈뜨게 되었다. 맛(고기->채소)이라는 본질은 변함없이 누릴 수 있었고, 더불어 건강이라는 이득도 챙기게 되었다.
고작 머리 하나 밀어 놓곤 무슨 호들갑이겠냐마는. 가진 것을 내려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나에게 불편함과 불이익이 따른다면 더 그렇다. 그래서 본질, 혹은 신념과 무관한 것들을 하나둘씩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언젠가 우리에게 본질을 위해 과감히 가진 것을 버려야 할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내려놓는 것의 긍정적인 면과 과감한 결단을 마음에 새겨 나갈 필요가 있고 삭발은 내가 하려는 여러 가지 내려놓는 연습의 하나이다.
지금 나는 머리가 조금 추운 거 빼고는 매우 좋다. 머리가 변해도 변함없이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