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 톨레도 가는 길, 나는 왜 작은 것에 분개하는가.
행복은 선택. 행복은 선택.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함수 상자처럼, 넣어버리면 행복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사랑한다.’ 소근하는 속삭임이 살갗에 닿아도, 반짝이는 에펠이 기어이 밤을 터트려도, 늘어지게 늦잠을 자다 햇살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도, 불안이 속절없이 엄습했다. 행복을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하루가 우리 강아지 배처럼 말캉해졌다. 마드리드에서 톨레도 가는 길에는 이 주문을 못 써먹고 한참 이성을 잃은 일이 있었다.
톨레도는 마을이 전부 세계 문화유산이라는 말을 들었다. 보통 세고비아와 묶어서 패키지로 찾는 곳이지만 하는 일이 여행뿐인 내가 다른 사람이 준비해둔 여행 서비스를 이용하기 민망했다. 우선 톨레도를 가기 위해 버스 터미널에 갔다. 줄이 길었다. 버스 티켓은 티켓 머신에서 구입할 수 있었는데, 마침 기계가 고장이라 아래층 매표소에 갔다. ‘기계가 고장 나서 표를 사지 못했다. 톨레도 가는 버스 표를 한 장 달라’고 했더니 매표소 직원이 버스 기사에게 구입할 수 있다 알려주었다. 한 시간 반 정도 기다려서 버스에 올랐다. 기사에게 버스 표가 얼마인지 물었더니, 버스에서 표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 물었더니, 매표소에서 표를 사 오란다. 이 말을 듣자마자 이성을 잃었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렸고, 매표소에서 표를 사면 다시 그만큼 기다려야 한다. 그만큼 기다려서 톨레도에 간다 해도 충분히 여행할 시간이 없다. 화가 났다. 온갖 상욕을 화면서 기사에게 대들었다. 나는 여기서 표 사라는 말을 들었는데 무슨 소리냐. 하지만 안된다고 하니 결국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도 도무지 화가 풀리지 않아서 매표소 직원에게 돌아가서 버스에서 표를 살 수 있다더니 이게 뭐냐 따지고 들었다. 그랬더니, 자기가 티켓 머신에서 표를 사라고 하지 않았냐며 다른 소리를 했다. 마드리드에 온 이유 중 하나가 톨레도였는데, 못 간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저 인간 때문에 못 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나서 이번에는 매표소 직원에게 상욕을 사면서 대들었다. 내가 언제 여기 다시 올 수 있다고. 아무래도 이미 오늘 계획은 틀어진 것 같다. 내 잘못도 아닌데. 억울하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분을 삭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마음이 좀 진정되었고 부끄러워졌다. 톨레도행 버스와 버스를 기다리는 줄에는 한국 사람들도 있었는데, 괜히 상관도 없는 나 때문에 불편했겠다. 저 인간 뭐냐, 같은 한국인이라서 싫었겠다. 여태껏 톨레도 못 가봐서 죽는 일 없었는데, 이게 뭐라고 나는 사람들한테 상욕까지 하면서 난리를 쳤을까.
행복은 선택이라고 매일 외고 다녔는데, 내가 행복은 선택이라고 외고 다닌 이유가 고작 매일 자유롭게 다녔기 때문인가. 웃는 사람들을 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누릴 대로 다 누렸기 때문인가? 행복은 선택이네 뭐네 지키지도 못할 오만한 말을 하고 다녔던 것인가. 너무 속상했다. 아무 죄도 없는 버스기사에게 미안했다. 매표소 직원도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으니 뭔가 오해가 있었겠구나. 영어 때문인가. 안타까웠다. 마드리드 시내로 돌아와서, 정처 없이 걸었다. 고작, 내가 이성을 잃고 흥분한 이유가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라니. 세비야 호스텔 빌런한테는 한마디도 못했으면서.
걷다 보니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떠올랐다. 손석희가 뉴스에서 꼭지로 소개해 줬던 시였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 옹종 하계 욕을 하고 /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하루 종일 강박적으로 외웠다. 내가 너무 작다. 속상하고 창피해서 울컥했다. 톨레도가 뭐라고. 그날 밤에 다짐을 하나 했다. 어떤 경우라도 일이 틀어졌다고 이성을 잃지 말자. 정신 차리고 내가 누릴 다른 일을 찾자. 제발 분개할 만한 일에나 분개하자. 다음 날은 모로코에 가는 날이었다. 가기 전 분노밖에 모르는 촌스러운 내 알고리즘을 마드리드에 죄다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