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 프라도 미술관, 고야와 벨라스케스
뉴욕에 현대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에르미타주 미술관, 그리고 마드리드에 프라도 미술관을 3대 미술관이라고 한다. 그 중 프라도 미술관은 중세부터 현대까지 약 8000점의 회화를 소장하고 있다. 물론 8000점이 있든 80000점이 있든 온전히 소화할 수 없는 나에게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의 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많은 작품 중에서 다행히 꼭 보고 싶은 작품이 두 점 있었다. 우선 하나는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였다.(크로노스를 로마식으로 사투르누스라 부르기도 한다.) 검은 배경 위에 아이를 잡아먹는 미치광이를 그린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 이야기를 담고 있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식 중 누군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리라는 예언을 받는다. 두려워진 크로노스는 대지의 여신인 아내 레아가 아이를 낳을 때마다 잡아먹는다. 슬픔에 빠진 레아는 더 이상 크로노스에게 아이를 잃을 수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낳은 아이 대신 돌덩이를 보에 싸서 크로노스에게 보낸다. 이로 인해 살아남은 아이가 제우스다. 제우스는 자라서 크로노스가 삼킨 형제들을 토해내는 약을 몰래 먹이고, 살아난 그들과 힘을 합쳐 크로노스와 티탄 신족을 공격한다. 바로 ‘기간토마키아’라는 신들의 전쟁이다. 크로노스는 이 전쟁에서 패하고 결국 제우스에 의해 왕좌를 찬탈 당한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보고 싶었다. 하나는 선명한 명암 때문이었다. 주제를 제외하고 배경을 어둡게 칠해버리는 기법이 흥미로웠다.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검은 그림이라 불리는 고야의 크로노스 외에도 빛과 그림자의 대가인 카라바조나 렘브란트의 그림도 볼 수 있었다. 사진을 취미로 하면서 사진은 빛을 쫓는 예술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빛과 그림자를 통해 주제를 선명히 드러내는 그림들은 사진의 예술성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참고 자료였다. 실제로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있으니 선명한 대비에 압도당해서 발을 쉽게 뗄 수 없었다. 빛과 어둠은 서로가 짙어질수록 선명해진다. 반대를 이용해서 선명해지는 방식이 교묘했다. 다른 하나는 친부 살해 스토리 때문이었다. 언젠가 알고 지낸 철학과 동생이 철학이란 친부 살해와 같다고 알려주었다. 지난 사유를 곧이 따르지 않고 마치 죽일 듯 달려들어야 한다. 즉 앞선 것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재창조하는 행위가 철학이라는 말이었다. 고야가 그린 크로노스 신화는 그리스 신화에 담긴 친부 살해의 원형을 보여준다. 시간이란 뜻의 크로노스가 아이를 잡아먹는 이야기는 결국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을 상징한다. 하지만 제우스는 크로노스를 쫓아냄으로써 덧없어 버릴 수 있는 숙명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알려준다. 바로 철학이다.
그러므로 고야의 작품을 실제로 봤을 때 한참이나 머물렀다. 친부 살해의 이야기를 명암으로서 선명하게 드러낸 작품은 내가 죽여야 할 나의 앞선 이야기를 떠오르게 했다. 과거가 시간을 통해 끊임없이 쌓여간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가 죽여야 할 사유 또한 쌓인다.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살려서 나는 이 숙명에 저항해야 하는가. 우선, 절대로 주저앉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 닥쳐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리라. 우울의 반대말은 행복이 아니라 활동이라 한다. 언젠가 오래 주저앉아서, 원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원망하곤 했다. 원망은 억울한 마음으로부터 잠시 도피를 돕지만, 내 삶이 원망으로 차기 시작하면 지향할 것이 사라져서 나아갈 수 없다. 지향할 것이 사라지면 따라서 생명력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도피는 답이 아니다. 크로노스가 자식을 잡아먹는 행위도 이와 같다. 창조 없는 파괴로는 살아갈 수 없다.
고야의 작품도 좋았지만 프라도에서 무엇보다 보고 싶었던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스페인 미술의 황금시대라는 16-17세기 작품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는데, 대체로 그리스 신화의 장면이나, 왕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담고 있다. 그중에는 고야의 그림처럼 시선을 확 당기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 어떤 작품도 시녀들에 비할 수 없었다. 입체성 때문이었다. 시녀들을 보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시녀들은 앞에 서니 서로 비슷했던 수많은 초상화들이 평평하게 느껴졌다. 면 위에 그려진 문자 그대로의 그림 같았다. 시녀들은 3차원의 세계를 보고 있는 느낌인데, 과장하면 걸어들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입체감이라는 게 원근의 기술에서 오는 거리감 때문이면 크게 울림이 없었을 것 같다. 프랑스의 오르세나 오랑 쥬리, 퐁피두 미술관에도 그런 작품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런데 시녀들은 달랐다. 원근 때문이 아니라, 그림에 담긴 복잡한 시선들이 공간을 넓히고 있었다.
그림 밖을 보고 있는 벨라스케스는 나를 보고 있는 건지,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거울에 비친 펠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는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캔버스의 주인공인지 그저 우리와 같이 그림 속 장면을 바라보고 관객인지 알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간 속에서 각자 일을 보고 있는 공주와, 시녀들, 난쟁이, 그리고 개. 그림 안에는 달리 상상할 수 있는 여러 시선이 중첩되어 있었다. 다른 작품들이 특정한 장면이나, 대상을 응시하게 했다면,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그림 속 이야기를 상상하게 했다. 가로 316cm, 세로 276cm의 시녀들은 실제로 마주했을 때 꽤나 큰 그림이었는데, ‘크다’라는 아우라는 그림의 물리적인 크기보다는 상상을 확장 시키는 시선의 입체성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고야나, 카라바조의 그림을 다시 생각해 보면 주제를 위해 배경을 어둠으로 지워 버리는 방식이 멱살 잡듯 시선을 움켜쥐어버리는 장점은 있을지언정, 캔버스 안팎을 끊임없이 상상하도록 유도하는 매력은 부족해 보였다. 시녀들에 담긴 이러한 복합성은 후에 큐비즘에 영향을 준다. 왜 카라바조나 고야의 명암이 아닌 시녀들의 입체가 이어지는 미술사를 뒤흔들었는지, 그림을 보면서 수긍할 수 있었다. 물론 시녀들은 빛과 그림자마저 인상적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시선의 입체성 뿐만 아니라, 물감이 마르기 전에 새로 붓질을 하는 알라 프리마 기법이 가장 뛰어나게 드러난 작품이다. 알라 프리마 기법은 그림을 빠르게 그릴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이는 후에 인상주의에 영향을 준다. 그림을 가까이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벨라스케스의 터치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체성만으로도 시녀들은 프라도에서 유일했다. 시녀들을 지나친 후 마주한 그림들은 누가 그렸든 심심했다. 그림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었다면 달리 즐길 수 있었을 테지만 아쉽진 않았다. 오히려 잘 몰랐기 때문에 그림을 마주했을 때 울리는 아우라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시녀들을 마주했을 때 독립적인 신선함이 꽤 오래 남아있다.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보았을 땐 그림 자체의 울림이 명성만큼 크지 않았다. 그래서 왜 ‘모나리자’만 유별나게 줄을 서서 보아야 하는지 고민했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그런 고민 없이 바로 납득할 수 있는 울림이 있었다. 예술이란 참 신비롭다.
그리고 나는 이런 유일한 것들이 좋다. 반복하는 것들 중에서 선명히 빛나는 하나.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하나. 희소하기 때문에 우쭐대는 희소가 아니라, 유일한 자기 방식으로 살아남는 희소. 내가 아는 몇 중에도 그리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이들을 존경한다. 이날 밤에는 호스텔에서 잠시 밖에 나왔는데 숙소 앞에서 기타 치고 있는 신사 두 분이 불러서 졸지에 어울리게 되었다. 나 노래 좋아하는 거 어찌 아셨을까. 같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알고 보니 걸걸한 목소리로 나름 세련되게 기타를 치시는 분은 마드리드에서 유명한 화가였다. 화가들은 참 재밌는 사람들이다. 화가들과 어울리느라 이날 하루가 참 즐거웠다. 가우디처럼 매일을 같이 살며 유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반복은 깊어지는 확장이다. 하지만 종종 이런 생신한 경험 덕분에 다채로워지는 삶도 좋다. 변화는 넓어지는 확장이다. 하나가 더해지면서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한다.
반대로 하나를 위해 하나를 지울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나를 찢어내는 것처럼 아프다. 고야가 배경을 검게 덮고서 자식을 먹는 크로노스를 그릴 때도,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는 덜어내서 여유로워지는 미니멀리즘과는 다르다. 미니멀리즘은 덜어냄을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할 수 없는 삭제는 강탈이다. 강탈은 이따금씩 절망에 이른다. 젊은 베르테르는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쏜다. 이는 사랑할 수 없는 로테를 자기 삶에서 찢어내는 아픔보다, 자기를 죽이는 아픔이 차라리 덜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서 사랑을 증명하는 명암을 선택하지 않고 입체로 중첩된 다른 사랑의 시선을 찾아냈다면 어땠을까. 행복은 선택이다. 베르테르는 2차원 평면에 담긴 초상화처럼 죽었다. 이는 비극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고받을 것 중에는 상상도 있어야 한다. 벨라스케스가 던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