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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iam Feb 11. 2023

초등학교 선생님 그만두고 세계여행

모로코 : 마라케시, 혼자보다 둘.

마라케시 공항에서 


“숙소 일오유로?(15유로)” 

“예스.” 

“아침 포함 일오유로?” 

“예스.” 

“저녁 포함 일오유로?” 

“예스”

아침, 저녁 챙겨주고 잠도 재워주는데 15유로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는 여섯이서 같이 자는 호스텔도 40유로가 넘었는데. 사하라는 대단한 곳이구나. 똑같이 먹고 자고 하는데도, 나라마다 이렇게 물가 차이가 날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어서 몇번을 다시 물었다. 유란님은 흔들림 없이 15유로를 외쳤다. 사하라에 모래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모래알이 다 금가루였구나. 아니면 사하라 숙박업자들은 죄다 자선사업가들인가? 마침 포르투 여행이 조금 지겨웠던 터라 유란님께는 다시 알아보고 연락을 드리기로 했다. ‘15유로라니 정말 말도 안된다.’

유란님과는 내가 사진에 취미를 붙인 뒤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진작가님들을 팔로우 하다 알게 되었다. 유란님은 포르투에서 스냅 작가를 하시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셨고, 제주에서 스냅촬영 일을 하고 계셨다. 이리 저리 소통을 하고 지내다, 유란님이 나처럼 선생님을 하다 그만 두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스냅 작가와 별개로 유스피아(Youthpia)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스피아 프로젝트는 사하라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이었다. 공교육에 한계를 느끼고 일을 그만둔 나로서, 세상에 이런 분이 다 있나, 반가웠다. 그래서 디엠을 보내 한 번 만나뵙고 싶다 말씀을 드렸다. 흔쾌히 받아주셔서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오실 때를 기다려서 만나뵈었다.

유란님의 사연은 이랬다. 나처럼 일을 그만두신 후 여행을 가셨고, 우연히 모로코와 사하라까지 가게 되었다. 사하라에 갔더니 아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발 하나도 못챙겨 신더라. 그래서 사하라와 모로코를 떠난 뒤, 학용품과 생필품을 챙겨 다시 모로코와 사하라로 들어갔다. 준비한 학습용품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유스피아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아이들을 돕고 있다.

‘와, 미쳤는데?’ 나는 이야기를 듣고 이리 훌륭한 분이 계신가 했다. 그래서 ‘저도 세계여행 가려고 하는데, 언젠가 모로코 가시게 된다면 제가 같이 가서 꼭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맨날 휴게실에 모여 아이들 욕하던 몇몇 선생님들을 생각하니, 이런 분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코로나 때문에 함께 사하라에 가지는 못했지만, 유란님은 포르투에 있는 나에게 포르투-스페인과 모로코는 그리 멀지 않으니 모로코 사하라에 가보기를 추천했다. 그러면서 15유로를 부르는데 마다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하나를 더 슬그머-니 얹었다.

“현석님 5월 5일 사하라 마을에 어린이날 행사가 있어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주려고 하는데, 현석님이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미끄럼틀을 만들어주면 어떨까요. 이미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으니 몸만 가서 현지인들을 지원하면 됩니다.”

드디어 내가 할 일이 생겼구나. 2년 전에, 유란님과 했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사하라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아프리카에 혼자 들어가기는 아무래도 무서워서, 유랑에서 동행을 구하고, 일정을 공유했다. 5월 5일 즈음에 사하라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이츠 오케이. 다행히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두 분과 연락이 닿았다. 학생분들은 마침 다른 분과도 연락 중이니 기다려서 일정을 계획하자고 했다. 순리대로 되는구나. 나는 바로 모로코행 비행기와 마라케시에서 머물 숙소를 예약했고, 유란님은 사하라에서 머물던 숙소를 알려주셨다. ‘핫산네’ 숙소 이름이 핫산네라니. 을지로 이모네 같은 이름이다. 알고보니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사하라 숙소였다. 의지의 한국인들 사하라까지 잘도 다닌다.


아프리카라니 정말 신났다. 내가 아프리카까지 가보는구나. 준비를 마치고 포르투를 떠난 뒤, 리스본과 라고스, 세비야, 그라나다를 여행했다. 슬 아프리카 일정이 다가오는 즈음에 동행 분들께 연락이 왔다. ‘코로나와, 중간고사 때문에 모로코를 못 갈 것 같아요. 죄송해요.’ 죄송할 일도 아닌데 착하신 분들이구나. 건강과 학업성취 빌어드렸다. 하지만, 큰일이네. 나 아프리카 무서운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닌데. 교환학생 분들이 따로 구해둔 동행의 연락처를 알려줄지 묻길래 귀하게 받아서 연락을 드렸다. 가보자 아프리카.

마라케시 공항에 도착하자 멀리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고운 손으로 채운 분홍빛 파스텔처럼 부드럽고 은은했다. 사진기로 담고 싶었는데, 아무리 조정을 해도, 분홍빛이 아니라 홍시빛 주황으로 담겼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이리저리 영상을 찍어보았는데, 아무래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 노을은 멀고, 수수해.’ 이렇게 밖에 전할 수가 없다. 잠깐 외로우려고 했는데,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아프리카 때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서 불가능했다.

공항에 들어서자 마드리드에서 출발하기 전, 파리에서 만난 차박차박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형 모로코 여행하기 조금 난이도가 있어요.’ 그렇게 여행을 오래한 차박이도 걱정할 정도면 긴장을 해야겠다. 흥분된 마음을 정리하고 화장실에 갔다. 모로코 남자들은 다들 키가 서장훈인가봐. 변기 위치가 상당히 높았다. 모로코 친구들 옆에서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처음부터 쉽지 않네.’ 지기 싫어서 뒷꿈치 당당히 들고 볼일을 보았다. 여기서부터 밀리면 사자(못 봄)와 하이에나(못 봄)가 우글거리는 아프리카 타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발목이 뻐근했지만, 감출 수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미리 예약해둔 택시를 타고 올드 메디나 광장으로 갔다. 메디나는 city라는 뜻인데, 예전 사람들이 살던 곳을 구분해서 올드 메디나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옥마을 같은 느낌인데,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이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곳이다. 올드라는 말이 어울리게 예전 모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라마단 끝무렵의 광장은 활기가 있었다. 종교 의식이 진행되는 낮에는 사람들이 엄격하니 행동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보야 문제는 낮이 아니라 밤이야. 나는 밤이 무서웠다. 다행히 택시에서 내리자, 숙소 직원인 karim이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기름진 올백머리에 청자켓이 잘어울리는 친구였다. 어디서 왔냐 묻길래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스마트폰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내밀었다. 한국인지 일본인지 이 친구에게는 그리 중요하진 않아 보였다. 진격의 거인이나 나루토 같은 영상을 보여주길래 나도 좋아하고 자주 봤다고 했더니,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다. 나중에 페즈에서도 숙소 직원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모로코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자라는지, 내가 만난 친구들이 유독 일본 애니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문화란 이리도 멀리까지 흘러서 사람들의 생활과 취향에 촉수를 뻗는다. 내 몸에는 몇 개의 촉수가 달라붙어 있을까. 모로코 낯선 친구와 소통할 수 있는 공통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모로코 정통 가옥인 ‘리아드’였다. 사방이 벽으로 막히고 천장에 구멍이 뚫린 가옥은 중앙을 중정으로 두고 사면에 방이 둘러져 있었다. 겉은 모래색으로 칙칙했는데, 안에 들어서니 파랑으로 칠한 벽과 빨강, 노랑, 초록이 기하학적으로 장식된 카펫 때문에 화사했다. 친절한 카림은 나를 루프탑으로 안내하고 홍차를 내주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커피보다 차를 훨씬 많이 마시는데, 나는 설탕을 조금 넉넉히 넣어야 마실만 했다. 그리고 마라케시 여행 정보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ㅎ ㅕㄴ ㅅㄴㄱ(발음이 서툴렀다.) 여기는 호객행위가 심해. 누가 말을 걸면 무조건 ‘No’라고 대답해. 또한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도울테니 반드시 전화해.”

굉장히 든든했다. 눈빛이 나루토 같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루프탑에 올라온 고양이들을 쓰다듬다 내 방으로 갔다. 여행한지 한달 만에 처음 써보는 개인실이었다. 유럽 호스텔과 같은 가격인데 방이 호텔 같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신경쓸 필요 없이 잠들 수 있다는 것이 이리 해방감을 주는지 몰랐다. 사람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침대에 늘어져서 누워 있는데, 고양이가 방에 들어왔다. 너 하나쯤은 재워 줄 수 있지. 같이 냐옹냐옹하다 잠들었다.

수빈님 만나러 가는 길 올드 메디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루프탑에 올라 친절한 카림이 내준 조식을 먹었다. 옆 테이블에 살집이 조금 있고 인상 좋게 웃으시는 프랑스 할머니도 한 분 계셨다. 담배 피우는 모습이 영화 같았는데, 알고 보니 숙소 주인이었다. 카림처럼 할머니도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카림과 주인 할머니는 프랑스어로 대화했다. 모로코가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받은 적이 있어, 모로코 사람들 중에는 프랑스어가 유창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의 관계와 역사에 관해서 나는 달리 무엇을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여기서 친절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조식을 먹고 약속한 장소로 갔다. 그리고 수빈 님을 만났다. 아프리카의 귀인, 이국 만 리 유일한 조선 동포, 어찌나 반갑던지, 바짝 굳어 있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수빈 님과 사하라로 가는 버스를 예약하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갔다. 다음날 출발할 사하라행 표를 달라 했더니, 라마단 끝난 뒤 휴일이라 운행하는 버스가 없다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야, 이것 참 망했다.’


당황했지만, 뭐 길이 있겠지 어쩔 수가 없었다. 마드리드에서 톨레도 갈 때 이미 마음이 한 번 어수선했던 경험이 있어서 빨리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빈 님도 빨리 적응하는 성격이라 다행히 감정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우리는 일단 마조렐 공원으로 가서 관광을 하기로 했다. 매표를 기다리는데, 해가 너무 뜨거워서 정수리가 다 타버리는 것 같았다. 마조렐 공원은 입생로랑이 묻힌 공원으로 유명하다. 파리에 있을 때, 시즌 이벤트로 미술관마다 입생로랑과 협업해서 전시를 했었다. 예를 들어 피카소 미술관이라면 피카소 작품을 활용한 입생로랑의 옷들을 전시하는 식이었다. 패션에 무지하지만, 그 이후로 조금 관심이 있었는데, 비비드한 컬러가 예쁜 그저 그런 공원이었다. 입생로랑의 흔적을 느낄만한 공간이 딱히 없어 아쉬웠다. 돌아가는 길에 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우리가 아는 것보다 값을 최소 두 배는 비싸게 불렀다. 사실 두 배를 불러도 그리 비싼 값은 아닌데, 속는다는 기분이 싫었다. 나보다 하루 먼저 모로코에 입국한 수빈 님은 이미 전날에 모르는 모로코 사람들 따라갔다가 비싼 식당에서 한 번 털린 상태였다. 그래서 흥정하고 흥정하며 걷다가, 별 수없이 나름 적게 부르는 택시를 타고 광장으로 갔다.

마조렐 공원

광장은 라마단 마지막 날을 맞아 분주했다. 기저귀 입은 원숭이를 데리고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있었고, 피리 소리에 맞추어 춤추는 코브라를 풀어두고 쇼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은 길에 일렬로 앉아 헤나를 하기도 했다. 라마단이지만, 여행객을 위한 이벤트는 여전히 성행 중이었다. 우리는 광장이 보이는 루프탑에 올라 밥을 먹고 다음날 이동할 택시를 알아보기 위해 투어 회사를 찾았다. 처음 찾은 투어 회사는 택시비로 400유로를 불렀다. 버스비가 30유로 정도였으니 한 사람당 7배가 뛰어버렸다. 라마단 때문에 버스가 운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배를 불릴 생각이었다. 고약한 모로코 상인들 같으니라고. 수빈 님은 흥정을 하려고 했는데, 나는 흥정의 범위가 아닌 것 같아서 수빈 님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유란 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에 있는 유란 님은 자기 일처럼 핫산에게 전화를 해서 택시를 수소문해주기로 했다. 사정은 사하라나 여기나 모두 같아서, 택시를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란 님에게 부탁을 했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광장을 돌다 그리 비싸지 않은 투어 회사를 발견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핫산 네가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마라케시 거리와 광장

나는 어찌 됐든 어린이날 핫산네로만 들어가면 되기 때문에 수빈 님 편한 쪽으로 맞춰드리기로 했다. 수빈 님도 내 사정을 배려해 주긴 마찬가지라 일단 투어를 예약하지 않고 유란 님과 핫산의 연락을 기다렸다. 다행히 모로코 마당발이라는 핫산이 택시를 구해줘서 180유로에 택시를 타고 갈 수 있었다. 어찌 길이 다시 생겼다.

하루 종일 땡볕에 걸었더니 목이 마르고 지쳐서, 우리는 신시가지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올드 메디나와 다르게 신시가지는 백화점도 있고 꽤 세련된 지구였다. 신통치 않지만 에어컨 나오는 곳에서 얼음 가득 찬 콜드브루 한 잔 마시니 용광로에서 쇠붙이처럼 달궈졌던 몸이 차게 식었다. 몇몇 개발도상국을 여행할 때 스타벅스를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스타벅스는 어디서나 에어컨과 난방이 훌륭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맛이 같다.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는 시원한 아메리카노의 맛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안정감이라고 할까. 저기서는 분명히 쉴 수 있다는 의존적 기대가 있다. 멀리까지 굳이 나와서 스타벅스를 찾기가 우습기도 하고 글로벌한 프랜차이즈가 잠식하고 있는 지역의 맛을 생각하면 조금 멀리할까 싶다가도 스타벅스 간판을 보면 그 모든 긴장이 땡하고 풀리는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따금씩 이런 생각도 한다. 나는 얼마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일까. 편안함에 관해서라면 취향을 넘어선 보편적인 안녕이 나에게도 있길 바란다. 스벅이나 맥날처럼 세계로 퍼진다고 어디 신음할 일도 없을 거다.

마라케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가까운 곳에 한인이 운영하는 통닭을 먹기 위해 나섰다. 현금이 필요해서 건너편 ATM에 카드를 넣었는데 기계가 카드를 먹어 버렸다. 당황해서 어쩌지 하고 있는데 수빈 님이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요청해 주었다. 혼자보다는 둘이다. 또유란해서 유란 님에게도 물어보았는데 이미 은행이 문을 닫아서 별 수 없었다. 카드를 정지시키고 일단 수빈 님에게 현금을 빌렸다. 수빈 님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카드를 다섯 장 들고 다닌다고 했다. 혼자였으면 버스도 못 타, 카드도 먹어 결국 무너졌을 테다. 고마웠다. (이날 밤에 다른 기계에서 돈을 인출했는데 그때는 잘 나왔다. 다만 돈 뽑는 동안 갑자기 수빈 님이 등을 치며 끌어내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모로코 거지가 뒤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더라. 수빈 님 아니었음 강도를 당하거나 도둑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내 카드..

 

마라케시 곤스치킨

한국인이 운영하시는 곤스치킨에서 통닭과 라면을 먹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우리 집 앞에 ‘있잖아요 아빠’에서 먹는 맛이 나더라.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싶었는데, 팔지 않아서 정말 아쉬웠다. 사장님이 여행 잘했냐 물으시길래 투어 회사에서 부른 얼토당토않은 택시비나 카드 먹은 일 같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했다. 나한테 카드 먹은 사건은 큰일인데, 여기서는 자주 있는 일인지 사장님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듯 들었다. 대신 투어 회사를 알아볼 때나 물건 살 때 팁은 상세히 알려주셨다. 그중에 나는 이 말이 좋았다.

“여기서는 기본 열 배는 부풀려요. 무조건 깎으셔야 해요. 상대가 포기할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상대가 포기할 때까지 포기하지 마라. 모로코까지 와서 치킨집을 하고 있는 사장님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맹세였을까. 낯선 곳에서 누구에게도 쉽게 의지할 수 없는 사람에게 포기는 생존에 문제였으리라. 종종 세상은 누가 끈질긴지 대결을 하는 콜로세움 같다. 끈질김이란 간절함이라, 종종 나는 끈질기게 하나를 해내는 사람을 보면 경이로움을 느낀다. 특히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사명감을 갖고 해내는 어떤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세상을 다소 쉽게 살아온 것 같아서 애 같단 생각을 한다.

물론 포기하지 않아서 고달픈 적도 있었다. 신이 있다면 포기할 때 포기하고 끈질길 때 끈질길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러면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아무튼 모로코 상인들에게는 내가 먼저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이다랑 장단을 맞춰서 통닭을 먹는데 아무래도 맥주가 없으니 군중 속에 고독처럼 맛이 허전했다. 종일 고생했기 때문에, 탄산이 가득 찬 맥주를 벌컥 들이키면서 시원하게 한 번 터트리고 싶었다. 그래서 사장님께 정보를 얻어 수빈 님과 맥주를 찾아 나섰다. 사장님이 혹시 팔지 모른다고 알려주신 작은 구멍가게를 찾았는데 없었다. 한참을 걸어 까르푸를 가도 없더라. 라마단이라 그랬는지, 원래 술을 안 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리 찾아다녀도 정말 한 방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별 수없이 광장으로 돌아갔다. 라마단이 끝나는 날이라 야시장이 열려 북적북적했는데, 모로코 사람들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오직 생수병 하나씩 테이블에 올려두고 유쾌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수빈 님이랑 혀를 찼다. 야시장을 몇 바퀴 돌고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이제 사막이다. 가보자 사하라.

마라케시 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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