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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R Apr 16. 2018

그 날 바다, 세월호

4년 전 그 날

그날 바다를 보고 4년 전 그 날들이 다시 선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가족들과 친한 지인 한 둘을 제외하고는 그때의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한 적은 없었는데 그날 바다를 보고 있자니 아직도 그때 마음을 잃고 허우적대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무겁고 괴로워 어디에든 그때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 졌다. 다소 긴 이야기이고 썩 기분 좋지 못한 이야기이다.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도 해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바닷속에 가라앉았지만 별이 된 아이들을 잊지 않기 위한 나름의 애도와 노력임을 밝힌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사에 출근했고, 오전에 세월호가 침몰되었지만 단원고 학생들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인터넷 뉴스를 보게 되었다. 어휴.. 큰일 날 뻔했네! 하며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전과 다름없이 오전 업무를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되고 근처 식당에 가서 메뉴를 먼저 주문하고 기다리며 다시 보게 된 TV 뉴스에서는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믿지 못할 자막과 함께 화면 오른쪽 상단에 숫자가 보였다. '462명 탑승, 4명 사망, 289명 실종, 구조 169명'


순간 눈을 의심했지만 아침에 본 뉴스가 오보였다는 얘기고 구조된 줄 알았던 사람들은 사실 배 안에 그대로 갇혀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미 배는 선미를 조금 놔두고 바다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 사고가 어느 정도의 큰 사고인지 잘 와 닿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배 안에 있었는데 왜 구조하지 않았던 거지? 분명 해경도 배가 가라앉기 전에 현장에 도착했고, 헬기도 있었던 것 같은데? 뭐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수장되었다는 뉴스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고였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야 했기에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 전과 다름없이 같은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전화가 온 것은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일하는 틈틈이 세월호 관련 뉴스를 계속 보고 있었고 핸드폰으로 업무전화를 계속했었기 때문에 대략 시간은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의심 없이 받았고 아버지가 쓰러져 중환자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에 바로 이야기를 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의식이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나를 쳐다보며 눈을 마주쳤고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뭐라고 말을 했다.


"뭐라고? 아버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응? 왜 이러고 있어? 말해봐!"


그 뒤로 아버지는 한 번 더 병원을 옮겨 검사와 치료를 했지만 그렇게 의식을 잃은 뒤 한 번도 깨어나지 않고 33일을 중환자실에 있다가 결국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 평소에 식사를 자주 거르고 매일 술을 마셨기 때문에 많이 야위어 있었긴 했지만 중환자실에서의 삐쩍 마른 모습은 처참하다 못해 처절해 보였다.


몇 년 전부터 삶의 의욕을 잃었는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았고 동생과 내가 마련해준 생활비로 근근이 생활하긴 했지만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생활비가 모자라서 필요하다는 통화를 했었고 늘 그렇듯이 잔소리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끊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끝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듣지 못했고 알 수 없었다.


중환자실에 아버지가 입원해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여동생에게 바로 하지 못했다. 가장 자주 만나는 여자 친구를 제외하고 친지들에게도 한 동안 말하지 못했다. 상황 정리가 되지 않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난감한 상태이기도 했지만 쌍둥이를 임신한 8개월 만삭의 임산부인 여동생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지 몰랐기 때문에 더욱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흘인가, 닷새인가를 낮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매일 병원을 갔지만 아버지의 상태는 변화가 없었다.


그 날 매제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동생이 갑자기 양수가 터져 병원에 입원했는데 쌍둥이들의 상태가 좋지 않아 바로 수술을 했다는 얘기였다. 어떤 상황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고 수술은 끝났지만 쌍둥이들은 둘 다 위험한 상태고 중환자실 인큐베이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카들이 무사하길 기도하면서 그 날은 병원에서 늦은 시간까지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고 이틀인가, 삼일인가 지나고 쌍둥이 조카 중에 한 아이가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 뒤로 나는 한 달 가까이를 낮에는 아버지의 중환자실에, 퇴근 후 에는 여동생과 아직 살기 위해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조카를 보러 매일 다녔다. 아이를 잃은 여동생이 마음의 아픔을 회복하지 못할까 봐 걱정도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은 조카는 상태가 호전되어 3주쯤인가 지나고 퇴원해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고 그 날 저녁에 나는 여동생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동생은 생각보다 침착하게 이야기를 들었고 자신도 힘들 텐데 아버지를 걱정하며 오빠도 마음이 무거웠을 텐데 고생했다며 오히려 위로를 해주었다.


동생에게 아버지가 생각보다 좋지 않은 상태이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고 매일 병원에 가고는 있지만 더 이상 손 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면회시간도 짧아 주말에나 같이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동생은 알겠다며 되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씩씩하게 같이 병원에 가자고 대답해 주었다. 늦게까지 동생과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새벽 4시인가, 5시가 거의 다 된 시간이었나 그랬을 것이다. 중환자실의 간호사의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위독하니 병원으로 빨리 오라고 했다. 바로 나오면서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이야기했다. 동생보다 10분쯤 먼저 중환자실에 도착했고 이미 자가 호흡이 안 되는 아버지를 간호사와 의사가 붙잡고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충격적인 모습에 몸이 굳어서 한 동안 움직일 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며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하지만 동생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멈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몇 초, 몇 분이 흘렀을까 동생이 도착했고 나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이제 됐다고, 그만 하라고 말하며 동생을 끌어안고 이제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울었다. 계속 미안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조금 더 일찍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동생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만 겨우 지켜보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세월호가 바다로 가라앉던 날로부터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내가 겪은 이야기다. 세월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나는 죄책감을 갖게 되었으며 아이들의 허망한 죽음 앞에 그저 면목 없는 어른일 뿐이다. 거기에 내가 겪은 일들로 인해 그 날은 나에게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어떻게 매일매일을 보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매일 면회시간에 맞춰 병원을 갔었으며 점심시간마다 외출해서 조금씩 늦게 돌아오다 보니 회사에 눈치가 보여 점심밥은 거의 먹지도 않았었고 매일 점심시간에 쓴 시간만큼 늦게 퇴근했었다. 그리고 아직 배안에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미친 듯이 세월호 관련 뉴스와 글들을 읽으며 공유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현실로 돌아왔지만 세월호를 알게 되면 알수록 분노는 실체화되어 갔고 그 대상도 점점 뚜렷해졌다.


그 뒤로 일상에 감춰졌지만 세월호에 대한 마음은 분노의 대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들을 찾게 만들었다. 다이빙벨의 이상호를 응원했으며 후원했고 세월호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펀딩에 참여했다. 세월호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내일로 여겼다. 그리고 지난겨울 거리로 촛불을 들고 나서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세월호가 늘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날 바다의 김 감독과 김어준이 이야기하는 가설이 사실이라고 100% 믿지 않는다. 가설은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김 감독이 가설을 두고 거기에 껴맞추듯 조사를 해 나갔든, 조사를 하다 보니 도달한 가설이 그것이었든 그건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사건이 감추고 있는 의혹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런 가설 하나가 사람들을 혹세무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의혹이 많은 세월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의미나 가치가 아닌 가설의 사실여부만이 중요한 사람은 분명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 그리고 그로 인해 함께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말미에도 밝히듯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제부터라고, 잊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와 의혹들를 이 계기를 통해 다시 주목시켜 진실공방을 통해 또 다른 진실이 밝혀지고 결국 최후에 하나까지 모두 밝혀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제 정부가 나서서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서주기를 바란다.


덧;;;;;


영화를 보든 안보든 자유지만 보지도 않고 사기꾼이네 혹세무민이네 하는 소리는 제발 안 했으면 좋겠다. 그 영화 만들 때 1원짜리 하나 보태지 않았다면 더 그러면 안된다. 그리고 도대체 이 영화가 왜 혹세무민이고 그 결과가 무엇이길래 비난하는지 모르겠다. 피 같은 내 돈을 가져다가 과학적으로 아무 근거 없는 가설(영화를 보면 그렇게 근거가 없지 않다. 영화 보고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다 바보인가?)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영화라서?


설령 그게 진짜라고 해도 난 하나도 아깝지 않다. 영화 만들어서 돈 좀 벌어 김어준이 고기 사 먹는데 쓴다고 해도 좋다. 지금처럼 나쁜 짓 하는 놈들 잊지 않고 전부 쫄아서 입 다물고 있을 때 내 대신에 나서 주는 스피커가 되어 준다면 계속 내 돈 가져다 써도 된다.


꼬박꼬박 갖다 바친 세금으로도 별의별 추잡한 짓 다하는 놈들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이건 정말 푼돈이고 거기다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김어준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한다고 이랬다 저랬다 할 인간이 아니다. 진짜 나쁜 놈들 세상에 알려줘서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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