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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R Mar 19. 2019

작지만 확실한 행복

육아일기 02

최근 몇 년 동안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바로 딸”채아”가 태어난 일이다. 채아가 태어나자 삶의 패턴이 모조리 리셋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가던 극장도, 날이 새도록 정주행 하던 게임과 미드도, 직장동료나 친구들과의 늦은 술자리도, 모두 리셋되었다. 바뀌어야 한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물론 충격적이고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경이롭기 그지없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내 평생 이렇게 잘 한일도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고는 했다.


매일매일 퇴근하고 곧바로 집으로 귀가하게 되었고, 출산 후에 손목이 아픈 마눌님을 대신해 딸의 목욕만큼은 거르지 않고 매일 씻겨주었다. 밤이면 밤마다 한두 시간 만에 깨어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를 갈아달다고 울어서 잠도 못 자고 혼이 나갈 정도로 정신없는 날이 계속되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채아를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만족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 6월에는 채아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었다. 뾰족한 대책은 없었지만 하루하루 이쁘게 커가는 딸아이를 맞벌이 부부라는 이유로 하루에 10시간씩 어린이집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회사를 다닐 수가 없었다. 그동안에 아이에게 무언가 심각한 잘못을 하게 되는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어떤 결핍 같은 것이 생기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주 6일에 12시간 가까이 일하는 곳이라 육아를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했었고 조금 더 크면 그때는 진짜 열심히 돈을 벌어다 줘야 하는 아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눌님과 오랫동안 상의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참고로 마눌님은 직장을 계속 다니기를 본인도 원하고 나도 그렇게 권했는데 한참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던 시기라 경력이 단절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 그렇게 하기를 권했다. 그에 비해 나는 이미 나이가 많고 더 이상 쌓을 커리어가 별로 없… 아무튼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육아 대디가 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매일 아침 10시까지 아이를 어린이집에(채아는 생후 8개월 때 국공립 어린 집에서 연락이 와서 고민하다가 일단 적응할 수 있는지 보자고 장모님, 마눌님과 상의해서 보냈는데 적응을 너무 잘해서 그 이후로 계속 보내고 있다.)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집안일을 하고 오후에 4시쯤 데리러 가면서 하루를 보냈다. 회사를 다닐 때보다 훨씬 더 바쁘고 정신없었는데 집안일을 혼자 하겠다고 선언했던 게 큰 실수였던 것 같다. 


강박증이 있는 탓에 어질러져 있는걸 못 보는 성격이라 치워야 했지만 불행하게도 효율적이고 빠르게 해치우는 능력은 없어서 집안일을 하느라 밥도 못 먹고 심지어 씻지도 못하고 하던 집안일을 널부러 뜨린 채 아이를 데리러 가고는 했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육아랑은 별개인 일들이 더 많았었다. 마음이야 모든 걸 해주고 싶지만 매일매일 해야 하는 간단한 집안일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저녁 때는 밥하느라 아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오매불망 마눌님이 올 때까지 두 손 놓고 기다리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결국 5개월인가 6개월 만에 집안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건강까지 나빠져서 결국 마눌님에게 헬프를 요청했다. 집에 도우미를 부르기로 했다. 이로서 호기로웠던 전업주부와 육아 대디의 삶은 금세 막을 내렸다. 물론 도우미를 들인 이후에도 한 동안 육아는 내가 맡아서 하긴 했지만 강박증 있고 손이 느린 나는 도저히 집안일까지는 해낼 수가 없었다. 10년 넘게 자취를 하며 쌓아온 노하우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딱 1인분만 가능했었지 3인분(아이까지)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다시 직장에 다니며 육아는 한 발 물러났지만 아이와의 관계에 소홀해지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인생에 정답이 있기는 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삶이, 현재가 소중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면서 살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하루를 살아간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미래의 행복을 기다리며 사는 일은 나로서는 매우 불합리하고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위태롭고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현재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 위에서 넘어지지 않고 춤을 추듯 살아가고 싶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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