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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 오랑아. 그리고..

by 글싸라기

드디어 오래된 애착 인형 오랑이를 종량제 봉투에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와 함께한 녀석. 특히 잠들 때면 내 곁에서 보고 싶은 그녀 대신 품에 안기며 위안이 되어준 녀석. 나와 닮았다며 장난치며 미소를 짓던 그녀와의 그리운 추억을 안겨준 녀석. 우리의 추억만큼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녀석이었다. 언제나 큰 입으로 방긋 웃고 있는 녀석을 굳게 마음을 먹고 꽉 움켜쥔 채 너저분한 쓰레기봉투 속으로 넣으려던 찰나, 이상하게 봉투 속으로 손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센 누군가가 억지로 팔을 잡는 것도 아니었고 엄청나게 무거운 물건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랑이 녀석이 발버둥 치며 팔다리를 사용하여 버티고 있을 리도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인형을 다시 머리맡에 두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추억 때문이었다. 오랑이에게 고스란히 배어있는 그녀와의 추억. 인형을 못 버리는 것 이 아니라 아직 그녀와의 추억을 버릴 준비가 안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 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랑이와 아무도 추억하지 못하는 아니, 누군가에게는 기억하기 싫을 수도 있는 성가신 추억들을 꼬질꼬질하게 묻은 때처럼 구차하게 매달릴 이유가 없어졌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지난 추억에 대해서 미련을 못 버린 나는 아직까지 과거에 멈춰 선 채 살고 있었다. 과거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내가 눈물을 흘리며 지금의 내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구차하다. 구차하고 미련하고 그지같다. 항상 어쩌면 이라는 기대로 매번 자신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나 자신이 진저리 나도록 미워졌다. 먼저 나 자신의 족쇄부터 풀고 헤쳐 나와야 했다. 해가 저물고 늦은 오후가 돼서야 다시 오랑이를 집어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서슴없이 쓰레기봉투 속으로 구겨 넣었다. 순간 가슴이 살짝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빌어먹을 미련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나 보다. 어쩌면 추억이라는 것은 인연보다 질긴 것 같다. 생의 마지막 순간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영혼 속에 각인이 되는 것이 추억인가 보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성공한 사람보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난 성공하긴 힘들 듯하다.


가득 차 있는 쓰레기봉투 안에 구겨진 채 웃고 있는 오랑이.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한 채 물끄러미 오랑이를 바라보았다. 묶여진 쓰레기봉투를 내다 놓으면 이제 다시는 오랑이를 보지 못한다. 녀석을 버리고 나면 이제 나도 마음껏 웃을 수 있을까? 오랑이가 없어지면 녀석의 미소 대신 활짝 웃을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아니 오히려 겁이 난다. 나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오랑이에게 의지를 많이 했나 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추억으로 살았나 보다. 쓰레기봉투를 버리기 위해서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봉투 안에 구겨진 채 웅크리고 있는 오랑이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전봇대 아래 쓰레기봉투를 내려 좋고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젠 정말 오랑이와 이별이다. 그리고 우리의 추억도...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녀석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았다. 쓰레기로 가득 찬 봉투 위에 간신히 집어넣은 탓인지 오랑이의 한쪽 팔이 쓰레기봉투 옆으로 툭 튀어나왔고, 순간 쓸쓸한 바람이 쓰레기봉투를 스쳐 지나가자 오랑이의 팔이 살짝 흔들렸다. 마치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이 가볍게 흔들리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뜨거운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잘 가 오랑아. 고마웠어. 그리고...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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