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는 가늠이 안 되는 늦가을 날씨.
산책을 나갈 요량으로 겉옷을 대충 걸쳐 입고 현관 앞으로 비쓸비쓸 걸어 나갔다.
담뱃갑에 남은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몇 남지 않은 마른 이파리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가는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에 놀란 힘없는 기다란 이파리는 저마다 황급히 나뭇가지 곁을 떠난다. 몸을 뒤틀며 날아가는 기다란 이파리들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을 유영하듯 뱅글뱅글 돌며 허공을 이리저리 떠다닌다. 익두스 문양이 회전을 하는 것 같다. 그런 이파리들 사이로 수많은 기억과 얼굴이 나부낀다.
웃는 얼굴, 화난 얼굴,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짐작이 되는 표정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 내 눈으로 느끼는 모든 사물들은 나의 뇌 속에 그대로 안식되지 않는다. 지나간 기억이, 지나간 모습과 상황이 지금의 실제를 왜곡시키고 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지난 생각에 갇혀서, 지난 억울함에 갇혀서, 맺지 못한 하소연들이 바짓가랑이를 잡고서 놓지 않고 있다.
무엇이 그토록 억울했을까.
무엇이 그토록 참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토록 미웠을까.
무엇 때문에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서로가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고 당신의 자신의 입장이 그러하기에 어쩔 수 없음이었지만 우리는 결코 그러면 안 되었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듯 하나하나 꺼내어 차분히 정리를 해 보아도 단호히 버리지 못하고 다시 기억의 서랍으로 밀어 넣는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도 있고, 한 번의 쓴 미소로 버려질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아닌가 보다. 서랍을 닫는 순간 찌릿하고 저릿한 통각이 느껴진다. 버려야 할 것은 지난 기억이 아니라 어딘가에 박힌 기억의 가시나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에 생긴 딱정이 인가보다.
여태껏 자신의 상처하나 가시 하나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무엇을 정리한다는 말인가. 피고름을 흘리며 딱정이를 붙인 채 무엇을 찾고 무엇을 해결하려고 그렇게 절룩거리며 허우적대고 있었을까. 어느덧 발끝에는 꽁초 여러 개가 뒹굴고 있다. 코끝을 시큰거리는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낮이 많이 짧아졌다. 하늘은 붉은색이 섞인 암회색의 파스텔 톤 커튼을 드리우고 있다. 커튼은 그라데이션 효과로 인하여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커튼의 붉은색이 거의 사라질 때쯤, 이타적인 표정을 지은 가면을 쓴 인간들은 피고름이 묻은 손으로 망각의 서랍 손잡이를 잡을 것이다. 그러고는 스스로 망각의 서랍을 열어서 각자 편리한 대로 모든 기억을 꾸역꾸역 넣고 닫아 놓을 것이다. 넓은 아량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웃음이 멈춘 채로,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그리고 눈물이 얼어붙은 채로.
물고기 모양의 낙엽 하나가 몸을 뒤틀며 허공을 계속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