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배추
오랜만에 산책을 나갔다. 게으름을 떨쳐내기 위해서 그리고 내 몸에 마중물을 끼얹기 위해서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동네를 한 바퀴 자박자박 걷다가 들어와서 무언가 떠오른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부리나케 모니터 앞에 앉았다. 미리 써둔 원고를 보자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마치 뜨끈한 물에 몸을 불리고 난 후, 손바닥만 대어도 술술 밀리는 국시 가락 같은 때처럼 고쳐야 할 부분들이 한도 끝도 없이 눈에 보인다. 한숨을 뱉어 난들 어쩌겠는가. 눈에 띈 이상, 이마에 내 천자를 지어버린 이상, 개학을 며칠 앞두고 잔뜩 밀려버린 초등학생의 여름방학 숙제처럼 급하게 허둥대며 해결해야 한다.
이런 번거로움이 글쟁이의 숙명인가 싶다가도 어찌 보면 오히려 글쟁이만의 행복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바뀐다. 완벽에 가까운 노력이라고 자위를 해도 좋지만 읽는 이의 입장을 생각한 배려에 좀 더 가깝다. 바쁜 일상 속에서 찰나의 순간일지언정 짬을 내서 나에게 다가온 귀빈이 아닌가. 그것이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나의 글을 선택해서 읽어주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등장인물의 이름과 성격, 몸짓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새로운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에피소드를 만들어본다. 무한한 상상 속 세상을 높게 쌓아 올렸다 다시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면서 귀퉁이가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쾌감을 느끼기 전까지 기대와 허무를 반복한다. 몇 달을 고뇌하며 끙끙 앓아대던 일을 시작도 못하고 아직까지 허우적거리는 꼴이라니.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미 낡아빠진 리어카를 허리춤에 올려두고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야기는 지지부진한 채로 머릿속은 거푸집 속에 콘크리트를 타설 한 듯 먹통이다.
11월이 다 가기 전에 적어도 초안은 마무리되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인공은 땅콩 배추를 팔아야 한다. 달큰하며 고소한 고갱이를 품은 땅콩 배추를 어서 팔아야 한다. 리어카 바퀴를 굴리며 앞으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