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감, 심미안, 혹은 취향

변해가는 나

by Dahl Lee달리

미감과 심미안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말이다.

미감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고, 심미안은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할 수 있는 보다 전문적인 눈이다.

미감 없는 심미안이란 학습된 안목 같은 것으로 실제로는 굉장히 드문 경우겠다. 미감은 있으나 심미안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겠고.


시각, 청각, 촉각, 혹은 도덕적인 면...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느 분야에 미감이 있다고 해서 다른 분야까지 다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시각적 영역의 미감은 없는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이 다 예쁘다고 하는 것들이 내 눈에는 예뻐 보이지 않았고, 미술학원을 몇 년을 다녔어도 큰 발전이 없었고 지루하기만 했다. 지금은 미감은 없어도 후천적인 심미안은 있는 것 같다.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많이 보고 경험한 탓이다. 그래도 여전히 내 또래의 다른 여성들에 비해 미감이 떨어진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래서 나 자신을 꾸밀 때는 다소 절제된 느낌을 선호하게 되었다. 어떤 게 예쁜지 모르니까(미감이 떨어지니까) 그냥 평범하고 단순한 것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취향이 되었다.)


반면, 나의 청각 분야의 미감은 상당히 발달하고 까다로운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귀가 예민한 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교회에 가면 큰 소리 때문에 괴로워서 스피커 주변은 꼭 피해 앉고, 다 함께 찬양을 하는 시간에는 귀가 아파서 꼭 이어 플러그를 낀다.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은 원장님이 성악 전공을 하신 굉장히 엄하신 분이었다. 옛날 학원인데도 청음 시험이나 악보를 듣고 옮기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시키셔서 귀가 더 발달하게 된 것 같다. 미술과는 달리 음악은 내게 자연스러웠다. 바이올린 학원을 다니면서 현을 다루는 미세한 감각을 배우며 어떤 소리를 아름답다고 하는가에 대한 고민하는 시간은 더 많아졌다. 청각적으로 미감과 심미안이 고루 발달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취향의 문제가 개입한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리스트, 슈만, 쇼팽, 바흐. 다 아름다운 음악들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는 베토벤을, 커서는 바흐를, 더 커서는 슈베르트를 확고하게 좋아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랑랑, 내게는 그의 연주는 그저 고문일 뿐. 나는 취향이 좁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취향도 변하는가 보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라흐마니노프도 나는 그저 심드렁할 뿐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았었다. (비통하고 장엄한 러시아 문학이 와닿지 않는 편인데, 같은 결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오늘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에 연결해 주었다. 수십 번 들은 음악인데도 오랜만에 들으니 분명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오늘 확실히 내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라흐마니노프의 숭고하고 장엄한, 감정이 폭발하듯 끓어 넘치는 면이 언제나 과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오늘은 그저 물 흐르듯 음악에 빠져들었으니 말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어릴 적부터 사람을 관찰하고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관심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부터 내 관심대상 1순위는 역시나 부모님과 할머니셨다. 무한히 반복되는 글쓰기 주제도 그래서 그들이다. 내 부모님과 할머니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비밀의 책 같다. 하나도 지겹지 않고 늘 새로운 기분이 들어서,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느낌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뛰어넘는 관심 대상 0순위는? 바로 나 자신이다.(푸하하) 나는 내가 궁금하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왜 이런 것을 좋아할까(이런 취향일까),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할까. 나의 심리, 나의 역사는 그래서 나의 0순위 글쓰기 주제이다.


나는 언제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고아들에게 집착했다. 소설을 써도 꼭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을 등장시켰다. 전에 다니던 개척교회가 특히 애착이 갔던 이유는 유난히 장애인, 고아나 다름없는 아이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름 풍족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큰 내가, 소위 한국의 '엘리트 노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내가, 왜 항상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기울어질까? 왜 나는 그들과 나를 동일시할까? 그것이 항상 궁금하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내가 좋아하는 '글'의 분야도 그렇다. 무엇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심미안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취향은 더욱 공고해진다. 글에서 나의 취향은 결벽증 수준이다. 내가 싫어하는 분야는 신파. 감정의 과잉. 그런 것이 싫다. 만연체, 긴 문장들. 그리고 모호함. 그래서 내 문장은 건조하고 딱딱하고 짧은 편이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자연과학을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번역을 해도 크게 느낌이 달라지지 않는 문장들이 좋다. 덜 스타일리시 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내 성격과도 맞물리는 특징이라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취향. 좋아하는 것은 섬세하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사람. 어떤 사람들은 피곤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예민한 사람들이 나는 좋다. 싫어하는 쪽은 거친 사람. 거칠고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느낌의 사람들을 싫어한다. 한의원을 하기 때문에 다양한 결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한 시간이지만 굉장히 피곤한 느낌이 든다. 난 차라리 예민한 쪽의 사람들을 선호한다. 남자보단 그래서 여자가 좋은 것 같다. 섬세한 남자는 또 나름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


오늘은 라흐마니노프가 참 좋다. 이 글도 그의 음악을 들으며 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방송을 집중해서 봤었다. 그가 간질환자였고, 극심한 빈곤을 겪었다는, 이 세상의 어두운 면을 몸소 다 체험했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졌던 작가인 것을 몰랐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러시아에 마음이 열린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말하길 러시아 예술은 깊이가 깊다고 한다. 내가 러시아 예술에 크게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아직 깊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겠다. 내가 충분히 깊어질 날을 기다린다. 지금의 내 세계를 넘어선 아름다움에 마음이 활짝 열릴 날을.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2 ㅣ Seong-jin Cho HELSINKI, FINLAND. (Dec.12.2018)












https://youtu.be/YviN1tuXbzc?si=O6owbasXWQxyc72_



작가의 이전글나는 돈 버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