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더듬기

독서일기/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by Dahl Lee달리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신기하게도 내가 직접 겪은 일보다 과거에 읽었던 책이나 본 영화, 들었던 음악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 때가 감수성이 많이 발달하던 시기였는지 그때 접했던 예술작품들은 아직도 내 혈관 속을 흐르고 있는 느낌이다. 마치 현재의 나의 틀을 만든 느낌. '너는 이런 결의 사람이다. 이렇게 자라나게 될거다..'


<마지막 황제> 같은 영화가 그랬다.

마지막 황제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Rain>을 듣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심장과 영혼을 울리는 현악기의 리듬. 쏟아지는 비. 가슴 저릿한 쓸쓸함. 나는 그때 부의에 빙의(?)해서 그 영화를 보았기에, 그의 실각과 청 왕조의 몰락이 너무너무 슬펐다. 거참.. 원래는 이렇게 감상하는 영화가 아닐 텐데 말이다.


<일급살인>, 어렸을 때 TV에서 본 영화인데, 이 영화랑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나는 왜 이런데 빠졌을까? 의문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어른이 되어 찾아보니 실크로드는 NHK에서 굉장히 히트한 다큐멘터리였다. 난 다큐멘터리 자체보다도 <실크로드>의 OST에 미치도록 매료돼서 그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특이한 감성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마이너이긴 하지만 분명히 독립된 하나의 장르가 존재하는 걸 보면. 당시 다니던 교회 전도사님이 뉴에이지 장르가 안티 기독교적 측면이 있다고 하셔서 그 이후론 뉴에이지 음악 듣는 걸 두려워하긴 했지만... 그 장르에 끌리고 또 끌렸지. 안된다고 하니까 더.



책으로는.... 어렸을 때는 참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지만 그중에서도 내 영혼을 쥐고 흔든 책들이 몇 권 있었다.

슬픈 책들이 먼저 기억난다. 어릴 적의 나는 작가들이 의도한 신파에 저항 없이 그저 몸을 맡겼었다. 슬픈 책이 있으면 온몸으로 울며 읽었다. 한 번 그렇게 읽은 책은 다시 읽을 수가 없었다. 양귀자의 <누리야 누리야 뭐 하니> 조창인의 <가시고기> 바르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같은 책이 그랬다.


하지만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 책들은 따로 있었다. 저렇게 눈물을 뽑는 것도 아니면서도 내게 깊은 무늬를 남겼다. 이상하기도 하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온갖 음식 묘사들을 나는 잊지 못한다.



수용소에 들어온 후부터 슈호프는 전에 고향 마을에 있을 때 배불리 먹던 일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무쇠 냄비에서 찐 감자를 몇 개씩이나, 채소를 넣은 죽을 몇 대접씩이나, 그리고 식량 사정이 좋았던 옛날에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게다가 우유는 배가 터지도록 마셨다.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었다고 지금 슈호프는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음식을 먹을 때는 그 진미를 알 수 있도록 먹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이 조그만 빵 조각을 먹듯 먹어야 한다 조금씩 입 안에 넣고 혀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양쪽 볼에서 침이 흘러나오게 한다. 그렇게 하면 이 설익은 검은 빵이 얼마나 향기로운지 모른다. 수용소 생활 8년, 아니 이제는 9년째로 접어들지만, 그동안 슈호프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전 같으면 입에 대지도 못할 것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제는 그것에 싫증이 났다는 건가? 천만에!



이 꽤 두꺼운 책 한 권에 음식 얘기가 엄청나게 나온다. 수용소의 하루란 어차피 먹는 것, 노동하는 게 전부인 듯하다. 솔제니친의 현란하고 다채로운 묘사의 기술들이, 변변치 않은 음식들에 사용된다.

주인공은 그 시답잖은 음식들을 얼마나 맛있고 소중하게 먹는지 모른다.




글을 매일 올리겠다고 다짐했었다. 완결성 있는 글을 하나씩 뽑아내려니 글이 작위적이 되어감을 느꼈다.

중간에 갑자기 중단되는 느낌이 있더라도 구조적 완결성보다는 글의 모든 문장이 진실한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이 글은 여기에서 마치려고 한다.


아참,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필적하는 묘사가 <비밀의 화원>에도 나온다. 버터랑 감자랑 우유랑 빵이랑... 이렇게 소박한 음식들을 비밀의 화원에 들어가서 피크닉 하듯 먹는 장면이다. 주인공인 소녀의 사촌은 대저택에서 오냐오냐 큰 병약한 도련님인데 하도 운동을 안 하고 침대에만 누워 생활해서 입맛이 없었지만, 주인공인 여자아이가 같이 살기 시작하며 운동량이 많아져서 마침내 건강해진다. 못 걷는 줄 알았는데 나중엔 걷고 뛰게 된다. 없던 식욕도 돌아와서 저런 소박한 음식도 꿀맛으로 맛있다고 냠냠 먹는다. 역시 운동하고 먹는 밥이 제일 맛있다(!)는 참 진리에 대한 글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식도락가가 아님에도, 어릴 적 읽었던 음식 묘사들은 왜 이렇게 생생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대작가들의 필력이 뛰어났기 때문일수도 있고, 인간은 어차피 본능적인 행위에 끌리는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먹는것, 싸는것, 자는 것 등등..

어쨌거나 나도 글을, 특히 소설을 쓴다면 꼭 음식 묘사를 탁월하게 해서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리라 하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다.



사람들의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쓰고 싶다.

꼭 대단한 무게 있는 글이 아니더라도, 맛있는 음식 묘사로라도, 타인의 기억에, 영혼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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