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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판타지를 없애야만 내가 살 수 있다

나는 더이상 가장 슬픈 사람이 아니다

by Dahl Lee달리

어린 시절 나는 항상 반에서 제일 슬픈 아이였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랬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사고로 걷지 못하시게 된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자주,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죽음 그 자체보다도 두려운 것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다가오는 죽음의 과정'을 눈으로 목도하는 것.

아버지의 다리는 매일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말라갔다.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는 것보다, 이불을 걷어 아버지의 말라가는 다리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말라가는 아버지의 다리를 쓰다듬으면,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손으로 감각하는 느낌이었다.


어린 나는 자주 머리가 아팠다.

두통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드물었다.

두통이 심하면 늘 구토를 했고 눈알이 빠질 것 같았기에 눈을 감고 있어야만 했다.

이 고통이 언제쯤 끝날 것인지, 어른이 되면 몸이 더 노쇠해진다던데. 내가 어른이 되면 삶은 얼마나 더 고단해질까?


이런저런 걱정과 불안으로 나는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기대가 없었다. 망상 같은 원대한 꿈은 있었지만 희망이 없는 아이였달까.


그 시절 독서와 글쓰기는 유일한 숨 쉴 구멍이었다.

죽음에 사로잡혀 사는 나와 코드가 맞는 친구는 없었다.

친구들과 깔깔대며 웃을수록 나는 외로워졌다.


나보다 조숙한 친구의 말을 경청하듯 독서를 했고, 말하고 싶은 것이 쌓여 내가 털어놀 차례가 되면 글을 썼다. 일기장에 혼자만의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위안을 얻었다. 어느 브런치에서 읽었듯이 그 시절 글쓰기는 내게 위로였다.


그런데...

어느순간,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정도로 슬픈 사람,

나정도로 본인이 글을 써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나정도로 글을 쓰는 사람...


내가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사람에게 나는 그저 그의 숱한 첩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발견한 기분.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라는 책은 글쟁이들의 '글을 쓰고 싶으면서도 쓰기 싫은' 양가적 마음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글쟁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나같이 슬픈 사람들이고 그래서 꼭 글을 써야만 하는 사람들이다.(적어도 그렇게 믿는)


전고운 이석원 이다혜 이랑 박정민 김종관 백세희 한은형 임대형이 이 책을 지었다.

나는 박정민 씨의 글 빼고 나머지 모든 글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맨 처음 실린 전고운 씨의 글을.

왜 맨 처음에 실린 것일까? 가나다 순도 아닌데 말이다.

여기 실린 모든 글 중 제일 잘 써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잔인하지만.


전고운 씨의 글의 일부를 옮긴다.

"... 사람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자신을 작아지게 만드는 존재는 결국 피하게 된다. 연인이든 친구든 부모든. 그렇다면 본질을 바꿔야 한다. 글과 영화에 대한 거대 판타지를 없애야만 내가 살 수 있다. 계속 사랑을 하려면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인정하고 없애야만 하는 것처럼. 어떤 존재나 가치도 절대적으로 아름다울 수 없다. 기존에 나를 동기화하던 가치관이 효력을 다하였다면 폐기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과감히 모든 것을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내가 남들보다는 조금은 더 비범한 줄 착각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기존에 나를 동기화하던 가치관이 효력을 다하였다면 폐기해야 한다."

이 문장이 내 심장을 쪼갰다.


나는 더 이상 반에서, 혹은 내가 속한 무리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 언제부터냐면, 억지로 웃는 걸 그만두면서부터다.

깔깔대며 밝은 모습을 지어낼수록 나는 안으로 썩어갔던 것 같다.

나는 행복한 척을 그만두었다. 예민하고 까칠하고 어두운 나를 그냥 드러냈다.

그랬더니 더 이상 무리 속에서 내가 가장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나는 정신적으로는 좀 더 건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슬픈 사람의 정체성, 글을 꼭 써야만 하는 동력이 사라져 버린 느낌도 든다.

그러나, 글쓰기를 위해 이미 멸망해 버린 신화를 계속 믿는척할 수는 없다.


더 이상 슬픈 사람이 아닌 나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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