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우리 집에는 두 가지 대비되는 문화가 있다고 느꼈다. 투철한 기독교 신앙의 어머니, 그리고 민족주의의 신봉자인 아버지. 그 두 문화는 대립하며 나를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하게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민족주의에는 무언가 수상한 구린내가 났다. 종교에 관한 한 결벽증적인 어머니가 아시면 기절하실만한 이야기들을 아버지는 가끔 슬쩍슬쩍 내게 흘리곤 했다. 그중 하나는 아버지가 대학교 때 ‘증산도’ 동아리를 했다는 것이다. 어릴 적의 나는 질문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질문에 두려운 답이 돌아올까 봐 속으로 질문을 삭이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가 비밀 이야기를 해주신 그날도 감히 그것이 뭐냐고 되묻지 못했다. 나중에 혼자 증산도에 대해 찾아보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가장 엄격한 회의론자이자 유물론자였다. 엄마의 기독교 신앙을 온갖 논리로 받아치는 아버지가 빠졌던 게 증산도라니. 절대로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의문을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놓고 한참이 지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책이 출간되었다. 할머니께 바치는 헌사 같은 책이었다. 그 책이 나오고서도 나는 두려움에 한 번도 펼치지 못했다. 마치 아버지의 속살을 들추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에야 비로소 장례식장에 숨어 그 책을 읽으며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몇 가지의 퍼즐 조각들을 얻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조각들을.
가부장제의 화신 같은 나의 아버지는 사실은 평생을 아비 없는 자식으로 자랐다는 것.
내가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친가 쪽 경조사와 만남에 엄청난 정성을 기울이셨다. 족보에 대한 정열도 대단하셔서, 한 번은 문중 사람들의 생몰과 혼인 등을 손수 조사해 책으로 만들어서 일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셨다. 그런데 한 번씩 이런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는 강원도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셨는데 아버지의 친가 식구들은 왜 다 전북에 사시는 걸까? 아버지의 책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아버지가 돌도 되기 전, 할머니는 무능한 남편을 버리고 자식들만 데리고 타향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거지처럼 살았다. 그동안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그치지 않았다. 할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나름 공부를 많이 한 유식자였지만, ‘반 식자’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설프게 배워 그걸로 식구들을 건사할 만큼의 능력은 없었다는 뜻이다. 할아버지는 농사일에 서툴렀고 게을렀다. 한의학 공부를 한 한의사였지만, 환자들을 치료하고도 돈 달라는 소리를 못해 제대로 돈을 받아오지 못했고, 일가친척들로 이루어진 마을에서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다.
논밭과 살던 집까지 마침내 다 남의 손에 넘어가고, 할머니는 자식들만 데리고 정든 마을을 떠나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쳤다. 할머니는 남의눈을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사는 것이 망신스러워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데서 살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의문은 바로 특이한 내 이름에 관련된 것이었다. 내 이름은 왜 정읍사에서 따왔을까?
아버지가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으시던 시절 가르치던 시라고 하셨는데,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실린 그 많은 시들 중 왜 하필 정읍사일까. 정읍이 동학과 천도교, 증산도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또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와 그 일가친척들이 모두 천도교를 믿었다는 것. 아버지는 대학시절 천도교에 관심이 많아서 깊이 연구했다고 했다. 그러나 웬걸, 아버지가 연구한 것은 천도교보다는 그것에 빠진 자신의 아버지였겠지. 평생 부모노릇이란 걸 해본 적 없는 할아버지라도, 아버지는 그에게 깊은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월북할 정도로 “대단한 빨갱이”었던 집안 어른 이정수, 국군에 징집을 거부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던 작은할아버지 등등,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친가 쪽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웅설화처럼 듣고 자랐다. 하도 자주 이야기해 주셔서 나는 아버지가 그분들과 살뜰한 추억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아버지 역시 성인이 되어 친가 쪽 친척들을 만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그들이 아버지의 뿌리로 남아있는 것 같다. 이상하기도 하지, 아버지가 평생 같이 살았던 것은 할머니인데 말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근원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아버지는 늘 가졌던 것 같다. 아버지의 정신적인 고향, 그곳이 정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힘겨운 뒷바라지에 힘입어 강원도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셨고, 결국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할머니의 한을 풀어드렸다. 초등 교사였던 어머니와 결혼도 하고 집도 마련하고 자식도 생겼다. 자식에게는 정읍사에서 따온 이름을 붙였다. 할머니는 그 시기를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로 기억하시곤 했다. 그분께서는 그 시절을 추억하시며 때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나도 영문도 모르는 채 할머니의 눈물에 전염돼서 같이 울었다.
평생 집 없이 떠돌다 마침내 안락한 가정을 이룬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수소문했다. 할아버지는 어느 과부의 머슴이 되어 거지처럼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와서 아버지로 대우했다. 할머니는 신혼 때 마지막으로 본 남편과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할머니의 기분은 어땠을까? 할아버지는 오래 가족과 함께 사시지 못하고, 내가 두 돌이 되던 해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결국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누워계시는데 아장아장 걷던 내가 할아버지 입에 새우깡을 넣어드렸고 한다. 할아버지 얼굴 근처에 내가 넣어드렸을 새우깡이 수북이 쌓여 떨어진 것을 어느 어른이 발견하고,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걸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가장 깊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두려운 목소리로 내게 털어놓기 시작하셨다. 할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자기라고, 자신이 얼마나 비정한 사람인지 아느냐고. 나는 그 순간 아버지가 대단한 자백이라도 할까 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어떻게 죽인 것일까. 미움과 원망에 목이라도 졸랐을까. 심하게 때리기라도 한 걸까. 맥 빠지게도 아버지의 고백은,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어도 병원에서 연명치료를 안 하고 집으로 모신게 아버지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할아버지를 간호하지 못했음에 영원한 죄책감을 느끼고 계셨다. 이제 육십이 훌쩍 넘으셨음에도, 할아버지에 대한 아버지의 내면의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애와 증, 원망과 미안함, 경멸과 존경하는 마음이 어지럽게 뒤섞인 전쟁이.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아버지는 비록 아비 없이 자랐지만, 내게는 늘 든든한 아버지가 가까이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유년시절 내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선생님이었다.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의 퍼즐을 맞추며 평생을 보냈듯이, 나도 나의 아버지의 퍼즐을 맞추려고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달변가이시만 언제나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쏙 빼놓으시는 느낌이다. 마치 그 부분은 내 힘으로 알아내 보라는 듯이. 아버지가 내게 주는 숙제라는 듯이. 나는 늘 아버지의 깊은 곳까지 가닿고 싶었다. 아버지의 삶의 질곡과 거기 맺힌 정서를 느끼고 싶었다. 아버지의 슬픔과 기쁨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은 그래서 내게 몹시 중요한 일이다.
나는 오늘도 아비 없이 자란 나의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애도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의 슬픈 아버지를 더욱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