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지 않는 방법.

by 이작가

오랜만에 산책에 나섰다. 사흘 째 눈이 와서 온 세상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햇빛에 반짝이는 눈을 밟으며 폐를 할퀴고 지나가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쉬는 기분이 좋았다. 나오기는 힘들지만 산책을 나오면 몸도 마음도 가볍다. 게으른 마음이 산책의 즐거움을 이기는 계절. 겨울은 자꾸만 따뜻한 곳으로 나를 유혹한다. 정작 자신은 추운 주제에. 겨울의 아이러니가 맘에 든다.


반짝거리는 눈을 사뿐히 즈려밟고 걸으며 산책하는 우아함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눈이 온 산책길을 온 신경을 걷는 데에만 쏟아야 할 정도로 미끄럽다. 중심을 잘 잡이야 한다. 춥다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가 넘어지면 낭패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설경은 어느새 뒷전이 된다. 한쪽 다리로 쭉쭉 밀며 미끄럼을 타는 것도 잠깐이다.


눈이 온 후라 운동화 밑창이 튼튼한 걸로 신었다. 옷도 든든히 입었다. 얼어 죽진 않겠다. 안경을 쓰는 사람은 알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추운 날씨에 걷다 보면 안경으로 입김이 올라와 앞이 흐려진다. 안경 신경 쓰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중심을 잡으랴 산책하며 명상을 하려던 나의 계획은 온데간데없고 살려는 의지만 가득하다.


앞서 걷던 사람 들도 이리 미끌 저리 미끌 중심을 잡느라 고생한다. 그런데 그때 남편과 나의 사투가 무색하게 마치 도인처럼 일 없다는 표정으로 쓰윽 지나가는 할머니 1, 할머니 2, 할아버지 1, 그리고 또 할머니 3, 할머니 4, 할아버지 2. 우리처럼 미끄러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기색이 없다. 산책길을 걸으며 어르신들 넘어지시면 큰일 나겠다고 남편과 걱정하던 순간이다.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었단 말인가.


한 참을 더 가도 마찬가지다. 어르신들은 표정 변화도 없이 산책을 즐기고 계셨다. 비교적 젊은 층이 미끄러운 길에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 내 주특기가 발동한다. 비교해서 원인과 결과 찾기. 어르신들은 걸음의 폭이 좁았다. 그리고 빨리 걸으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하늘을 보고 호수를 보며 때로 이야기를 하셨다. 반면 젊은 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보폭이 크다. 빠르게 걷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길을 가다가 넘어지지 않기 위한 방법은 많다. 조심조심 걷기, 장비를 잘 갖추기, 보조기구를 사용하며 걷기. 많은 방법 중에서 과정을 즐기며 넘어지지 않는 방법은 천천히 걷는 것 같다. 삶이라는 산책길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가기 위해서는 천천히 가야 한다. 급히 가다 보면 중심을 잃기도 하고 넘어지기 마련이다.


목표만 생각하고 급하게 가다 보면 순간의 즐거움과 기쁨을 놓치기 쉽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급하게 정신없이 도달한 목적지에서 느끼는 감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허무함과 헛헛함에 빠져 더 높은 목적지를 설정하고 또 앞만 보고 달리게 된다. 목적을 향해 달려 나가는 마음과 함께 주변을 즐길 수 있는 느림을 받아들인다면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천천히 걸으면 다르게 움직이는 세상을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시간 속에 존재하게 된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농도와 깊이가 달라진다. 오늘 그 깊이를 느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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