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파티
하얀 도복에 빨간띠를 당당하게 메고 한쪽 손은 미소의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을 번쩍 들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엄마는 학원 선생님이다. 수업을 해야 해서 언제나 서준이가 미소를 발레 학원에 데려다준다. 오늘도 미소는 발레 학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쓴다. 서준이는 그런 미소를 달래는 기술을 이미 터득했다.
“미소야, 발레학원 가기 싫지?”
“응, 가기 싫어. 나도 오빠처럼 태권도 학원 갈 거야.”
“미소야, 떡볶이 먹고 싶지?” 떡볶이는 미소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응. 떡볶이 먹고 싶어.”
“오빠가 사줄까?” 뾰루뚱한 얼굴은 어느새 귀염둥이 막내가 된다.
서준이는 미소의 손을 꼭 잡고 학원 앞 분식집으로 간다. 그리고 단골집 아이답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서준이와 미소 입에는 이미 침이 고여 있다. 떡에 양념이 골고루 잘 배어있다. 아주 좋은 타이밍이다. 시간을 잘 못 맞추면 국물과 떡이 따로 노는 밍밍한 떡볶이를 먹어야 한다. 니맛도 내 맛도 아닌 맛이 꼭 엄마가 요리한 김치찌개 같다.
“ 서준이랑 미소 왔구나? 뭐 줄까? 떡볶이? 핫도그?”
“컵 떡볶이 두 개랑 슬러시 두 개 주세요. 저는 포도맛이고요. 미소는 무슨 맛 먹을래?”
“ 오빠 나는 슬러시 안 먹고 컵 떡볶이 두 개 먹을래. 그래도 돼?”
“미소야, 그걸 다 먹을 수 있겠어?
"참, 아줌마 돈은 엄마가 나중에 주신다고 했어요."
"걱정하지 말고 먹어, 엄마가 돈 다 내놓으시고 갔어."
엄마는 분식집에 3만 원을 미리 계산해 놓으신다. 그러면 서준이와 미소가 아무 때나 배가 고프면 가서 먹을 수 있다. 분식집 아주머니가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미소는 컵떡볶이 두 개를 다 먹고 나서야 발레 학원에 갔다.
서준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용감한 오빠다. 엄마 아빠가 늘 바빠서 서준이가 미소를 챙겨야 할 때가 많다. 미소는 발레 끝나고 서준이는 태권도 끝나고 미술 학원에서 만난다. 그리고 만들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미소는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다.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뚝딱뚝딱 잘도 한다. 하지만 서준이는 재미가 없다. 미술 학원에 다니기 싫지만 이 시간에 미술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가 있을 곳이 없다. 할 수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하나 둘 서준이 옆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와, 서준이 그림 좀 봐. 엄청 재밌다. 그렇지?"
재미있으라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나 지금 진지하다.’ 마음을 다잡고 그린 그림이다. 웃으라고 그린 그림이 아닌데 웃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오늘은 다행히 큐브 만들기는 하지 않는 날이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미술학원에서 큐브 수업까지 해야 한다. 아빠가 회사에서 늦게 오시는 날이기 때문이다. 어떤 화요일이나 목요일, 아빠가 일찍 데리러 오는 날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때 세상에서 아빠가 가장 멋져 보인다.
미술 학원 바로 옆에 피아노 학원이 있다. 이제 피아노 학원만 끝나면 집에 갈 수 있다. 서준이는 하루가 참 길다고 생각했다. ‘아, 삶은 끝이 없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갑자기 자신이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에 뿌듯한 미소를 지어본다.
피아노 선생님은 정말 친절하시다. 우리에게 맛있는 것도 많이 주시고 미소가 피아노에 엎드려 잠이 들면 안아서 소파에 눕히고 담요도 덮어주신다. 어떤 날은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피아노를 들려주시기도 한다. 피아노를 치러 가서 듣는 게 이상하지만 그 시간이 서준이는 좋다. 아무도 없는 피아노 학원에 선생님과 미소 그리고 서준이 이렇게 셋이 있다. 엄마는 늘 피아노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했고 선생님은 언제나 괜찮다고 하셨다.
“서준이 미소가 워낙 착하고 말을 잘 들어요. 저도 아이를 친정어머님께서 봐주시는데 우리 아이 생각하면 서준이 이랑 미소가 더 예뻐요.”
아빠는 잠든 미소를 업었다. 서준이는 자기 가방은 뒤로 미소 가방은 앞으로 메고 아빠 손을 꼭 잡았다. 아빠의 넓은 등에 잠든 미소가 편안해 보인다. 서준이는 긴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아빠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 많은 말이 어떻게 다 차곡차곡 그 작은 몸 안에 담겨 있었는지 모르겠다. 잠에서 깬 미소도 오빠가 컵떡볶이 두 개를 사줬다고 자랑한다. 먹다가 옷에 흘린 것은 엄마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아빠에게 윙크한다. 미소의 윙크에 아빠의 피곤한 하루가 눈녹듯 사라진다.
“아빠, 오늘 엄마는 몇 시에 끝나? 오늘도 늦게 와?” 미소가 힘 빠진 목소리도 물었다.
“엄마 지금 집에서 삼겹살 파티 준비하고 있는데?” 아빠의 갑작스러운 말에 미소가 아빠 등에 업혀 발을 동동 구른다.
“정말? 정말 엄마 집에 있어? 왜? 오늘은 왜 일직 끝났어? 서준이도 엄마가 집에 일찍 와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콧구멍이 벌름거린다.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간다. 긴 하루의 보상 같다.
”오늘 학원 형아들 중간고사 끝났대. “
오늘은 아빠의 발걸음도 가볍다. 넷이 함께 저녁을 먹은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아이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소가 아빠 쌈에 젤리를 넣었지만 아빠는 젤리 삼겹살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서준이는 오늘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