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을 좋아한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딱히 먹을 것이 없다. 입맛까지 없다. 이럴 때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바로 비빔밥이다. 밥 먹기는 귀찮고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을 때 며칠 동안 반찬통에 다소곳이 자리 잡고 앉아 간택되기만을 기다리는 녀석들을 한데 모은다. 뜨끈한 밥 한 공기에 각종 반찬들을 옹기종기 모아 놓으면 예술작품같기도 하다. 한국인의 힘, 고추장을 알맞게 넣고 취향에 따라 김가루도 좀 뿌려준다. 비빔밥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마지막에 한 바퀴 휙 두르는 참기름이다. 참기름의 고소함에 콧구멍이 저절로 벌름거린다.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먹음직하게 비벼내면 숟가락은 거들뿐 입안에서 폭죽이 터지고 잔치가 벌어진다. 각자의 고유한 맛도 맛이지만 이 녀석들이 한데 어우러져 내는 맛이란. 비빔밥을 먹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맛. 그래서 더 무서운 맛이다.
재료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새로운 맛을 내고 더 좋은 맛을 내는 비빔밥처럼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다. 각자의 독특하고 훌륭한 것들이 혼자서도 멋지게 빛날 수 있지만 서로가 어우러져 더 멋진 것을 만들어 낸다. 혼자서만 더 잘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능력만 있다면 혼자서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마면서 알게 되었다. 세상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함께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함께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고 함께 하는 사람들과 쌓여가는 유대감을 통한 감점의 풍요로움이 더 큰 가치로 자리 잡는다.
탱글탱글 꼬막반 밥반 꼬막비빔밥. 봄을 알리는 여린 열무김치를 넣고 쓱쓱 비벼 먹는 열무 비빔밥. 보리를 오랫동안 불려 지은 밥에 이것저것 되는대로 재료에 고추장 한 숟가락 푹 퍼서 비벼 먹는 보리비빔밥. 100살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신념을 갖게 하는 산채비빔밥.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소고기 비빔밥도 빼놓을 수 없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집집마다 특화된 비빔밥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우리집 비빔밥엔 진미채 무침을 잘게 썰어 넣는 게 우리집만의 비법이다.
깜깜한 밤에 혼자서 반짝이는 별은 더 빛나 보이고 대단해 보이지만 혼자서 빛날 뿐이다. 하지만 무리를 지어 뜬 별은 각자를 돋보이게 할 수는 없지만 서로 어울려 곰을 만들고 사자를 만들고 물병을 만든다. 혼자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자신의 가치를 함께 있음으로 깨닫게 된다.
양푼에 담긴 비빔밥을 온 식구가 둘러앉아 숟가락으로 양껏 퍼 먹으며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하며 묵혔던 피로를 풀어낸다. 쌓아뒀던 감정을 풀어 내고 풀리지 않던 문제를 해결한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가족의 유대는 더욱 단단해지고 끈끈해진다.
요즘 가족 간의 관계가 뜨뜨미적지근 하다면 큰 양푼을 꺼내 냉장고 속 모든 재료를 뜨끈한 밥 위에 보기 좋게 올려놓고 고추장 푹 퍼서 올리고 계란 프라이도 양껏 올려 비빔밥을 만들어 보자. 참기름 한 바퀴 두르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속는 셈치고 한 번 해보자. 진짜 비빔밥의 효능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