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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나에게 말을 걸 때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인가요?

by 이작가

같은 교실에 앉아 같은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점심시간에는 같은 급식을 먹는 다고 해서 우리는 평등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학생이 된 다연이는 혼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엄마가 새벽에 건물 청소일을 하시기 때문에 아침은 주로 다연이가 준비한다. 엄마가 끓여 놓은 찌개를 데우고 눈도 못 뜨는 동생을 밥상 앞에 앉힌다. 아침에 감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다연이의 눈물도 뚝뚝 떨어진다.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먹고 설거지는 개수대에 밀어 넣고 학교에 간다. 어제 늦게까지 유튜브를 봐서 피곤하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수학 시간이다. 도대체 선생님께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초등학교 때 배우던 것과는 수준이 다르다. 새벽까지 유튜브도 보고 수업 내용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오전 시간 내내 졸다 보니 점심시간이다. 오후 시간은 아주 엎드려 잔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미대에 가는 것이 꿈이지만 가정 형편상 학원에 다닐 수 없다. 미대에 가는 것은 정말 꿈이 되어가고 있다. 그 후로 미술시간에는 그냥 자버린다. 미술 선생님은 그런 다연이를 보고 혀를 찼다. 학원에 다니지 않는 다연이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놀이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제 유튜브에서 본 연예인들 이야기가 한창이다. 놀다가 지루해지면 돈을 모아 코노(코인 노래방)에 거거나 PC방에 간다.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집에 가 동생 밥을 차려주고 또다시 핸드폰을 켠다. 수업 시간에 자서 잠이 오지 않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터에서 돌아온 부모님은 다연이와 동생을 챙길 틈도 없이 쓰러져 주무신다. 다연이는 오늘도 새벽까지 유튜브를 본다.


같은 반 민지는 엄마가 몇 번을 깨워야 겨우 일어난다.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민지는 눈을 감은채 세수를 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에 달걀말이와 생선 한 토막 그리고 늘 상주하고 있는 반찬들을 보며 인상을 쓴다. 반찬이 맘에 들지 않는다.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은 엄마는 밥을 한술 떠 생선을 발라 올려놓고 아~ 한다. 민지는 할 수 없이 몇 번을 받아먹고 가방을 멘다. 늦게 일어난 탓에 엄마가 차로 등교를 도와준다. 학교에 가는 동안 민지는 잠시 눈을 붙인다. 1교시 수학 시간이다. 학원에서 배운 내용이다. 수업이 이해되니 재미있다. 국어 시간도 사회시간도 아는 내용이 나오니 지루하지 않다. 아침을 얼마 먹지 않아 급식이 맛있다. 점심시간 동안 친구들과 운동장을 걷는다. 요즘 살이 찐 것 같다고 엄마가 운동을 좀 하라는 말이 생각났다. 오후 시간은 민지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 시간이다. 미대에 가는 것이 꿈인 민지는 좋은 대학에 많은 학생을 입학 시키기로 유명한 학원에 다닌다. 미술 선생님은 민지의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종합 학원까지 끝내고 집에 오면 9시다. 늦은 저녁은 삼겹살이다. 이제야 민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고기를 양껏 먹고 과일까지 먹는다. 방에 들어와 책을 읽는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들이려는 부모님의 노력으로 이제는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다. 해야 할 숙제를 끝내고 11시쯤 잠자리에 든다.



"저는요 나무가 참 좋아요. 고아원은요, 비실비실한 나무 두세 그루가 하얀 담안에 서 있을 뿐인데요. 마치 고아 같지 뭐예요. 그 나무를 보고서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 가엾어라.
만약 너희들이 다른 나무들과 함께 깊은 숲 속에 살고 있어서
가까이엔 맑은 물이 흐르고 산새들이 와서 지저귄다면
틀림없이 너희들도 훨씬 더 훤칠하게 자랐을 텐데.



앤이 초록지붕으로 가는 마차에서 매튜 아저씨에게 하는 이 말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앤이 하는 이 말이 가슴에 박힌 유리조각처럼 아팠다. 고아원 나무가 선택해서 그곳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자신이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다. 앤도 다연이도 다른 곳에 뿌리를 내렸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같은 나무지만 뿌리를 내리는 곳의 환경에 따라 성장하는 모습은 다르다. 햇빛도 잘 들지 않고 양분도 풍부하지 않고 개울도 옆에 없다면 그 나무는 앙상한 가지에 나뭇잎도 몇 개 달리지 않겠고 몇 개 달린 잎들도 생기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양분이 풍부한 땅에서 햇빛도 충분히 받고 개울도 가까이 있어 항상 물이 끊이지 않는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튼튼한 줄기와 풍성한 나뭇잎을 키워낼 것이다.

<오른쪽 나무는 숲에서 자란 나무, 왼쪽 나무는 고아원에서 자란 나무>


우리는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숲 속의 나무처럼 그리고 민지처럼 운 좋게 좋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면 이제 그 운을 나눠줘야 할 때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곳에 뿌리를 내린 아이들을 못 본 척 눈감아서는 안 된다. 태어난 환경은 선택할 수 없지만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어른들이 지켜줘야 한다. 비록 척박한 토양에서 자랐지만 앤이 초록지붕에 입양되어 따뜻한 보살핌과 좋은 교육을 받으며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한 것처럼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 태어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


누구나 앤이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매튜와 마릴라가 될 수도 있다.

#빨강머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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