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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나에게 말을 걸 때2

하루의 시작과 끝 - 아침

by 이작가
오늘 아침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지 않아요.
아침부터 그런 절망에 빠져 있어야 되겠어요?
아침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에요.


새벽까지 못한 일을 하고, 못 읽은 책을 읽으며 늦은 잠을 자는 나에게 아침은 참 피하고 싶은 단어다. 아침이 조금만 더디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10분만 아니 5분이라도 더 포근한 이불속에서 뒤척이고 싶다. 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 한 정신과 반쯤 뜬 눈으로 햇빛을 마주하며 세상으로 빠져나온 정신이 경계에 서서 팽팽한 기싸움을 한다. 결국 쓰디쓴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위까지 내려가 온몸을 휘감고 나서야 정신이 든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아무리 기쁜 기억도, 아무리 슬픈 기억도 내 삶에서 천천히 자취를 감춘다. 밤새 망각이 이루어지지 않고 기억이 계속된다면 아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를 살 수 있는 것은 어제를 기억하지 못해서 일 것이다.


고양이는 뇌에 신피질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한다. 신피질이 없는 고양이는 매일 같은 사료를 먹어도 같은 놀이를 해도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지루해하지 않는다. 당연히 스트레스도 받지 않아 우울증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나에게도 신피질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해본다.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오로지 눈앞의 당면하고 있는 현재 안에서만 존재하고 싶다. 하지만 현재에만 충실하며 산다는 것이 맘처럼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길고양이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고양이도 나를 본다. 고양이는 '너도 참 고생이 많다' 위로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런 고양이에게 잠깐이지만 부러운 눈으로 말한다. '넌, 외롭지 않아 좋겠다.'라고 그러자 고양이는 말한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야.' 한 동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 각자의 길을 간다.

삶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지쳐 쓰러져 잠이 든다. 다시는 희망을 꿈꾸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 하지만,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아침은 온다. 아침이 밝아 오면 새로운 꿈을 꾸고, 사랑을 노래하며, 실수를 하더라도 다시 부딪힐 용기를 얻게 된다.


새롭게 다짐을 하고 시작할 수 있는 아침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고양이처럼 과거도 미래도 신경 쓰지 않고 주어진 하루를 현재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며 살아내는 일은 또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지만 하루의 기적을 만들 수 있는 용기를 낼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아침은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날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했던 갖지 못 한 날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일 수 있는 소중한 오늘의 시작이다. 그 출반선에 선 우리는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며 자신의 삶을 그릴 수 있다. 크리스마스 날 머리맡의 선물처럼 아침은 자고 있는 우리 머리맡에 미리와 기다리고 있는 선물이다.


밤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다.
하루의 완성은 저녁이 아니라 아침이다.
아침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하루의 가치는 결정된다.




아침 / 이작가


새벽의 깊은 호흡에

아침은 헛기침을 하며

대지를 깨운다.


알 수 없는 새들이

순서대로 자신 목소리로

아침에 키스한다.


부산스러운 아침은

나를 꿈꾸게 한다.


이슬 한 모금

아침밥을 먹고

이나무 저 나무

안부하는 다람쥐.


낮게 깔린 안개는

시린 눈으로 햇살을 맞이하며

자신을 숨긴다.


고요한 아침은

나를 시작하게 한다.


대지의 정령이

바쁘게 움직이는 아침


눈이 부시게 찬란한 아침

그렇게 기쁜 하루의 문을 활짝 연다.



#빨강머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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