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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지만 불편한 어머님의 위로

집안일

by lucidity

어느 주말, 저녁상을 치우고 앉아있는데 아이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거신 분은 바로 시어머니.

어머니는 손녀와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시며 저녁은 먹었는지 엄마는 뭐하는지 아빠는 뭐하는지 물으셨다.


"엄마는 소파에서 휴대폰 하고 있고, 아빠는 설거지하고 있어요"

"왜 엄마는 휴대폰하고 아빠를 설거지시켜?"

"모르겠어요"


며느리인 내가 듣기엔 불편한 대화가 몇 번 더 오간 후, 설거지를 끝낸 남편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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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는 여자만 해야 하는 건가?' 나는 의문이 들었다.

지난번 시댁에 갔던 일이 생각났다.

가족이 적게 모인 점심식사. 식사 후 남편이 설거지를 하려 하자,

어머니는 극구 말리셨고 본인이 직접 설거지를 하셨다.

평소에는 시누이나 며느리인 내가 하는데 그 날은 아들이 한다 하니 직접 하신 것이다.

난 그 날 집안에 감돌았던 이상한 공기가 기억났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지금으로부터 한 6~7년 전쯤 남편이 시댁에서 설거지를 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적잖이 놀라셨지만, "아들 장가보내니 많이 변했다"며 나쁘지 않은 기색을 하셨다.

하지만 그 날 이후부터 식사가 끝난 후에는 딸에게는 설거지를,

며느리에게는 잔반 처리를 시키는 등 업무 분배를 하시기 시작하셨다.

그 이후로 남편은 한 번도 시댁에서 설거지나 어떤 '일'을 한 적이 없다.

늘 시누이와 나, 어머니 여자들의 몫이었다. 아, 하지만 쓰레기 처리는 항상 아버님이 하셨다.


그 날 아이와 시어머님의 통화를 듣고,

아들이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본 어머니의 첫 반응은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나는 시어머니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내 마음에서 만들어 낸 불필요한 불편함 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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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님께서 우리 집에 머무르셨던 어느 날, 어머니는 지저분한 거실을 보며 내게 물으셨다.

"너는 이렇게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놓여져 있으면 불편하지 않니? ㅇㅇ이는(딸) 퇴근하고 왔을 때 이런걸 보면 화가 많이 나서 아이들에게 화를 많이 낸다더라"

어머니는 단순히 나의 성향에 대해 궁금하셨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화가 먼저 났다.


우리는 맞벌이인데, 내가 이 너저분함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당찬 며느리가 되어 대답했다.

"전 신경 안써요. 어차피 치우는 사람은 저고, 신경 쓰면 저만 화나잖아요!"

그 자리에는 남편도 같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남편이 뜨끔하길 바랐다.


내 작전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남편은 어머니가 내 흉을 보려고 하실 때마다 내 편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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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좋은 분이다. 연세 답지 않은 센스도 있으시고, 배려도 깊으시다.

다만 전업주부로 산 세월이 길다 보니

집 안에서 살림을 돌봐야 하는 여자의 위치와 가정경제를 책임졌던 남자의 위치가 익숙하신 탓일 것이다.

하지만 맞벌이로 사는 나는 어머님의 이런 편견이 조금은 아니 사실 많이 불편하다.

"돈 벌고 애 키우고 살림하느라 네가 고생이다"라는 말씀으로 며느리인 나를 종종 위로하곤 하시는데,

그 위로는 내게 달갑지 않다.


그건 결국 살림도, 육아도, 일도 여자인 다 내가 감내하라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어머니에게 악의는 전혀 없고, 그 모든 것들을 나보고 다 해내라는 압박도 아니다.

그저 당신이 살아오신 인생이 고달팠기에

후 세대의 딸과 며느리가 안타까워 전하는 진심어린 위로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며느리인 나를 향한 위로라는 것이 느껴지지만

'내가 저걸 다 해야돼? 왜?'라는 물음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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