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안일한 우리 사회의 단면
수사ㆍ탐정 영화 속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범죄 현장에 도착한 탐정은 용의자의 발자국부터 살핀다. 발자국 하나에는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많은 단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생활에서 디지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디지털 발자국'의 중요도 또한 점증하고 있다. 코로나19 위기가 그 속도를 가속화하는 양상이다.
디지털 발자국이란 개인이 창조해낸 디지털 정보를 의미한다. 내가 남긴 유튜브 댓글부터 SNS에 올린 셀카, 지인과 사적으로 주고받은 메일, 나의 디지털 기기에만 저장된 문서까지 모두가 디지털 발자국을 이룬다. 현대인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디지털 발자국을 찍어댄다. 그러지 않고는 타인과 교류하거나 경제활동을 하기 힘들어진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디지털 발자국을 남기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개인정보인 디지털 발자국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단 사실이다. 탐정이 찾아 헤매는 현장의 발자국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쉽게 사라진다. 다른 이의 발자국과 겹쳐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디지털 발자국은 비와 눈에도 끄떡없을뿐더러 무한정 복제도 가능하다. 디지털 범죄를 수사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난 현대의 탐정들에겐 희소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오늘자(29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검찰은 그간 ‘대검찰청 전국디지털수사망’에 14만여 건의 디지털 정보를 저장해왔다고 한다. 이 중 약 5만 건은 현재도 보관 중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이 규정한 수사 대상과 기간을 넘어 디지털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해온 결과다. 이처럼 압수수색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는 별건 수사에 활용될 여지가 있어 지우지 않고 보관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법원이 발급하는 압수수색 영장에는 ‘전자정보의 필요성이 소멸된 후에는 지체 없이 삭제ㆍ폐기하여야 함’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실효성은 없다. 법원은 무분별하고 자의적인 디지털 정보 수집에 의해 만들어진 증거를 걸러낼 의무가 있지만, ‘실체적 진실’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절차적 흠결을 용인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안일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민주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의 하나는 ‘사생활 보호’다. 나의 디지털 발자국을 분별없이 수집하는 정부 기관을 소리 높여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은 점차 디지털 발자국이 현실의 발자국을 압도하는 모양새다. 끊임없이 생성되는 디지털 개인정보를 보호할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탐정들의 수사 편의를 위해 우리의 개인정보를 무한정 제공할 순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