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너진 신뢰를 보강하는 장치가 금소법일 테다
요즘 사람들은 계약서를 쓰지 않고 살기 힘들다. 전근대 사회와 달리 ‘평판’이 잘 작동하지 않는 오늘날엔 ‘계약’으로 상호 신뢰를 구축한다. 셀 수 없이 많은 계약서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읽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나 법조인이면 모르겠으나, 생소한 내용으로 가득 찬 계약서를 일반적인 사람들이 단번에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표적인 상황이 은행 업무일 테다.
지난달 말부터 시행된 금융소비자법(금소법)을 두고 시끌시끌하다. 금소법에 따르면 은행은 고객에게 판매하는 모든 금융상품에 대해서 6가지 판매 원칙(적합성 원칙, 적정성 원칙, 설명의무, 불공정 영업행위 금지, 부당권유행위 금지, 허위·과장광고 금지)을 지켜야 한다. 지나치게 강화된 원칙 때문에 고객들이 예ㆍ적금 계약을 할 때도 삼십 분씩 소요된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일부 은행은 설명 의무 이행을 증빙하기 위한 자료로 녹음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금소법 도입에 따른 혼란은 없으면 좋겠으나, 제도 도입 취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은행들의 부실 사모펀드 판매가 투자자에게 큰 손실을 야기하는 일이 잦아지자 도입된 게 지금의 금소법이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라임ㆍ옵티머스 펀드 등 부실펀드를 투자자들에게 원금이 보장되는 투자인 것처럼 판매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 은행은 고령의 치매 환자에게 해당 펀드를 판매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 환매 중단이 잇따르자 수천억 원에 달하는 투자금이 증발했다. 은행 측은 설명의무를 성실히 이행했고 투자자와의 계약에 따른 것이었다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 계약 당시 설명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은 불완전 판매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대다수 사람들이 은행과 어떤 방식으로든 계약을 맺고 살아간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 원활한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은행이 제공하는 계약서를 모든 이들이 꼼꼼히 읽고 서명을 하진 않는다. 복잡한 계약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모두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국가가 공인한 은행이니만큼 믿고 서명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연속으로 터진 사모펀드 사태는 이러한 신뢰를 악용한 결과다.
지난해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 과정 속에서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금융사와 금융권에 대한 신뢰도가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은행과 계약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무너진 신뢰를 보강하는 장치가 금소법일 테다. 계약을 맺기 위해 복잡한 설명을 거쳐야 하는 건 은행이 자초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