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들의 복통
이맘때쯤 야트막한 동네 산책로를 걷다 보면 꽃무늬 일모자를 쓴 할머니들을 마주친다. 할머니들은 쪼그려 앉아 능숙한 손놀림으로 풀섶에 난 나물을 캔다. 엄마는 서울 바닥에서 자란 나물이라 찝찝하지만, 못 먹을 것들은 아니라고 한다. 이건 무슨 나물, 저건 무슨 나물 설명이 이어지지만 내 눈엔 갈색은 흙이고, 초록색은 다 같은 풀일 뿐이다.
난 고사리와 콩나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물맹이다. 식탁에 오른 나물은 종류를 따지지 않고 먹는다. 식당이나 가게에서 파는 이름 모를 나물을 볼 때면 그 옛날 대학 축제에서 부추가 떨어지면 잔디를 뜯어 만들어 팔았다는 '이름만' 부추전이 떠오른다. 뭐든 잘 먹는 난 양념한 잡초가 식탁에 올라도 그러려니 하고 연신 젓가락을 가져갔을 것이다.
초록빛의 엇비슷한 풀들이 지금처럼 세세하게 구분된 이유는 뭘까.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고육지책의 결과이지 않았을까. 우리 선조들은 배를 채울 만한 것을 찾아서 이것저것 먹어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먹을 만한 나물을 발견해 칭찬도 듣고 배고 채웠다. 반면 누군가는 독초를 먹고 연신 설사를 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 식문화에는 유난히 많은 나물 요리가 있다. 나물의 종류뿐만 아니라 조리법도 다양하다. 삶고 지지고 볶는 일은 예사다. 겨울 찬바람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나물은 최고 별미로 친다. 그 덕에 질리지 않고 꾸준히 채소를 섭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먹고살기 위해 각종 풀떼기를 뜯어먹었던 조상들의 노고와 조금이라도 맛있게 먹어보고자 했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자신의 업적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섰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선배 과학자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를 얹었다는 뉴턴의 겸손함이다. 나물을 먹고 못 먹고가 뉴턴의 발견처럼 세상의 풍경을 바꿀만한 대단한 사건은 분명 아니다. 다만 오늘 내가 먹었던 나물에는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수많은 선조들의 복통이 있다는 사실만은 자명하다.
내가 이름 모를 나물도 서슴지 않고 입으로 가져가는 이유도 선조들의 어깨 위에 서있기 때문인 셈이다. 그런 것이 비단 나물뿐일까. 그러지 않은 것을 찾는 게 어렵다. 고생한 선조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