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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연습134] 우한연구소

-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펴듯

by leesy

"내 말이 맞지?" 사후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애석하게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당시에는 합리적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다들 입을 닫고 있었을 뿐이다. 인간은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찬 존재다. 우리의 머리에는 위험을 예측하는 온갖 시나리오가 있다. 시나리오를 공공연히 말하고, 하지 않고는 개인의 윤리에 달려 있다. 우리 사회는 합리적 근거가 없는 시나리오를 음모론으로 칭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원을 두고 세계가 다시 점화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미국 정보기관의 자료를 근거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우한 연구소 기원설을 보도했다. 지난해 반짝하고 사라졌던 우한 연구소 기원설은 이제 코로나 발원의 유력한 가설로 주목받고 있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판데믹 초기부터 연구소 기원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트럼프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하기 전에 우한 연구소 내 연구원 3명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월 코로나 발원의 원인을 찾기 위해 중국 우한으로 향한 바 있다. 하지만 부실한 현장 검증과 중국 정부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외려 사람들의 불신을 키웠다. WJS의 보도가 사람들의 불신과 만나 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판데믹 내내 트럼프와 대립각을 세웠던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소장도 우한연구소 기원설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국내 반응도 달아올랐다. 많은 수의 네티즌들이 우한 연구소 기원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중에는 트럼프처럼 "내 말이 맞았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트럼프와 네티즌들은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사건이 이렇게 전개될 줄 알고 있던 걸까. 아니면 남몰래 숨겨둔 대단한 정보라도 있던 걸까. 우한 연구소 발원설이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절대다수는 뒷걸음치다 쥐 잡는 소의 신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의 문서와 WJS의 보도는 연구소 기원설을 증명하지 못한다.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선 과학적 근거가 필요하다. 그 때문에 저명한 과학자들이 <사이언스>를 통해 새로운 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비협조적 태도를 문제 삼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우한 연구소 진원설을 뒷받침하진 않는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산 초기 중국 정부의 소극적 대응과 WHO의 안일한 태도가 국지적으로 끝날 수 있었던 감염병을 세계화시킨 바는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엔 반중을 넘어선 혐중 정서라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는 사실과 의견을 뒤섞는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펴듯, 그 안개가 조금은 걷힌 뒤에야 합리적 판단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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