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신의 탈
인간의 생명은 ‘부서지는 토대’가 될 수 없다. 혁신을 이야기할 때마다 언급되는 혁신의 아버지 조지프 슘페터는 성공한 기업은 발밑에서 부서지는 토대 위에 서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속적인 도전과 경쟁을 통해 부서지고 극복하기를 반복해야 혁신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혁신이 자본주의를 선순환하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오늘날 혁신은 종종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삼는 듯하다. 21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혁신 기업 쿠팡의 이야기다.
쿠팡은 지난 3월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되며 일약 ‘애국’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의 유니콘 기업들은 졸지에 쿠팡 바라기가 됐다. 다른 테크 기업들이 곧 쿠팡의 선례를 따라 미국 증시 상장을 도전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미국 전자상거래 업체 1위 아마존의 성장 궤도를 따라가던 쿠팡이 어느덧 한국의 아마존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것이다. 공격적인 투자와 마케팅으로 적자 기업 신세는 면치 못하고 있지만, 쿠팡의 눈부신 미래를 의심하는 이들은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쿠팡이란 전차는 한쪽 바퀴는 아마존의 성공 궤도를 따라가면서, 반대쪽 바퀴는 아마존의 전철 또한 그대로 밟고 있다. 미국 내에서 아마존 물류센터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정평이 나있다. 축구장 몇 개를 붙여 놓은 물류센터에서 직원의 화장실 시간 조차 통제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직원들의 잦은 부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국내 쿠팡 물류센터의 노동 환경도 가혹하긴 매한가지여서,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쿠팡은 아마존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그리고 함께 코로나 집단 감염의 온상이기도 했다. 총알배송을 자랑하던 혁신 기업은 일터의 안전을 다룰 땐 한없이 느리기만 하다. 우리 사회가 추종하던 혁신 기업의 민낯은 직원의 안전 보호 의무를 회피하고, 유예하는 전근대적 노동 환경인지 모른다. 이러한 행태가 혁신의 탈을 쓸 때 기업의 이익은 최대화, 손실은 사회화된다.
17일 새벽 쿠팡의 한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해 사흘 만에 진화됐다. 그 과정에서 소방관 한 분이 순직했다. 화재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내부 스프링클러에도 불구하고 화재가 이토록 확산된 원인도 규명해야 한다. 쿠팡의 잦은 사고에 분개한 일부 소비자들은 쿠팡 불매 운동에 들어갔다. 물류센터의 안전불감증에 대한 문제의식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점에서, 쿠팡의 안이한 대응이 사고를 이렇게 키운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쿠팡을 혁신 기업이라 불러도 되는지 의문이 생긴다. 쿠팡이 딛고 있는 ‘부서지는 토대’는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