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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y Jan 20. 2021

[작문연습36] 노숙인

- 오늘날 노숙인이 노숙인으로 불리기까지는

 오늘날 노숙인이 노숙인으로 불리기까지는 노숙자와 부랑인을 거쳐야 했다. 우리 사회의 차별에 대한 민감도가 상승할수록 지붕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부르는 명칭 또한 변해왔다. 내가 중학생일 때 체육 선생님은 학교 밖을 배회하는 노숙'자’들을 지저분하고 게으른 사람들로 묘사했다. 너희들은 절대 저렇게 되지 말라는 조언도 곁들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등굣길 대로에 놓인 벤치들 위에는 쇠로 만든 손잡이가 생겼다. 게으른 노숙자들이 벤치 위에 눕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노숙자를 다룬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다. 서울역에서 최초로 좀비 바이러스에 걸리는 이는 노숙자다. 끙끙 앓던 노숙자는 몇 차례 구조 요청을 거절당한 채 홀로 길 위에서 좀비가 된다. 좀비가 된 노숙자가 하는 일은 마주치는 이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좀비 바이러스를 옮기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하나로 규정하는 일은 쉽고도 편리하다. 노숙인처럼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과 유리된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노숙인의 정체성이 게으름이 되는 순간 길 위의 삶은 그들이 감내해야 할 대가로 여겨진다. 그에 따라 지붕이 있는 사람들의 삶과의 분리 또한 당연해진다. 그것은 게으르지 않은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보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노숙인들이 게으름의 결과로 거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은 쉽게 잊힌다.

  

 이는 비단 노숙인에만 한정된 현상만은 아니다. 집단의 속성을 간소화하는 건 우리 사회의 오랜 관습이다. 특정 인종, 국적, 계층, 성별, 연령 집단을 향해 단일한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조선족은 이렇고, 흑인들은 저러하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러하다. 이렇게 부여된 집단 정체성은 쉽게 떨쳐내기 힘들다. 집단의 정체성은 개인의 정체성까지 점유해 지울 수 없는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낙인 된 정체성에서 촉발한 사회적 갈등에 봉합을 기대하기 힘든 이유다. 일상적 상황에서 이같은 갈등은 못 본 채 넘어갈 수도 있다. ‘게으른 노숙자’들이 서울역 추위에 떨든 구걸을 하든 나와 상관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재난 시에 위기는 서울역을 넘어온 사회로 퍼져간다. 우리는 지금 판데믹의 한가운데서 그 실황을 목격 중이다. 사회적 재난은 가장 취약 계층부터 공격한다. 그들은 단일한 정체성이 부여된 채 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사람들이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시인 존 던은 장례를 알리는 종소리의 주인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노래한다. 누구의 장례인지 궁금해하지 말라고. 우리는 하나의 섬이다. 시인은 누군가의 죽음은 섬의 모래가 바다에 휩쓸린 것과 같다고 말한다. 모래가 쓸려갈 때마다 섬의 크기는 점차 줄어들기 마련이다.  코로나19는 대다수 인류가 난생처음 겪은 재앙이다. 그간 일삼았던 낙인과 배제의 논리를 수정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수많은 희생을 통해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재앙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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