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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y Feb 10. 2021

[작문연습48] 핵

- 빈곤은 위계적이고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계급 사회에서 신분을 규정하는 건 부모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 짓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재산의 유무였다. 이에 따라 계급 갈등의 주된 원인 또한 빈곤이었다. 윗분들이 너무 많이 가져 아랫것들을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 그 사회는 위기에 직면했다. 입에 풀 칠하기도 힘든 아랫것들이 곳간마저 가득 채운 윗분들을 향해 죽창을 들고 일어설 때다.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은 체르노빌 사건 당시 원자력 발전소 위로 피어오르는 스모그를 보며 생각했다. “빈곤은 위계적이고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벡은 근대 사회의 위험은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 구조가 복잡해지자 위기의 예측 불가능성은 높아졌다. 예고 없이 항공기가 추락하고 여객선이 침몰하고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다. 이 같은 재난이 빈부를 따지지 않고 어디서든 피어오르는 게 근대 사회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 인류가 겪는 위기는 그 어떤 위기보다 위계적이다.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전염병’ 앞에서 스모그 같은 민주적 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진 이들은 오히려 자산 증식의 기회로 위기를 활용하고 있다. 반면 없는 이들은 위기의 복판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계층 간 양극화는 점차 심화하고 있다. 공교육 시스템 내에 있는 아이들마저 위계적으로 교육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위험사회>의 소재가 된 원자력 발전소 사고 위험도 한국 사회에선 위계적으로 작동한다. 전국 200여 시군구 위계서열 가운데 최상층부를 점유 중인 서울은 원전 사고 위험과 거리가 가장 먼 동네 중 하나다. 사용 에너지는 많지만 생산 에너지는 적은 에너지 자립도 최하위 수준의 지역이다. 그럼에도 서울에 발전소를 짓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서울이 가장 비싸고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이 많이 사는 땅이기 때문이다.


 최근 월성원전 1호기를 둘러싸고 정국이 혼란스럽다. 2014년 운영 중단이 예정됐던 월성 원전은 한 차례 수명 연장 조치를 받은 바 있다. 그러다가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건 정권이 들어선 뒤 조기 폐쇄됐다. 이 과정에서 월성 원전의 경제성을 강제로 낮췄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하루에도 관련 기사 수십 개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발전소 주변 주민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경제성에 매몰된 사이 이미 노후화된 원전에서 발생했던 사고들은 묻히고 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사라진 지 100년이 넘었다. 이후로 빈곤의 위계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공공은 배곯는 사람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늘려왔다. 그럼에도 위험을 외주화하는 데 있어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지나질 정도로 위계적이다. 원전 경제성 논쟁은 스모그마저 위계적인 사회의 적나라한 실체를 보여준다. 경제성을 위해 안전을 희생할 수 있다면 위험은 누구 몫이 돼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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