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무엇인가. 영화는 다양한 거짓에 살을 붙여 만드는 예술품이다. 연기도 소리도 빛도 시간도 모든 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지만 관객들은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영화의 시작, 극장에 들어가길 무서워하는 ‘새미(가브리엘 라벨)’에게 아빠 ‘버트(폴 다노)’와 엄마 ‘미치(미셸 윌리엄스)’는 새미를 안심시키기 위해 영화를 각자 다르게 설명해 준다. 버트는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원리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해준다면 미치는 옆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이것은 ‘좋은 꿈’ 같은 거라고 설명한다. 그 꿈은 정말 새미의 꿈이 된다. 거대한 기차가 전복되는 장면은 새미에게 강렬하게 각인이 된다.
새미에게 영화란 자신이 통제권을 가진 사건 사고를 실제처럼 찍어내는 일이었다. 그 욕망은 새미의 현실이 안전하고도 평화롭다는 믿음 안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뽑고 총을 쏘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들이 영사기 안에서는 몇 번이고 반복된다. 현실을 그대로 찍어 내는 건 시시하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에 우울해하는 엄마를 위해 캠핑 영상을 편집해 달라는 버트의 부탁에도 시큰둥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새미는 화목했던 캠핑 영상을 편집하면서 아버지의 절친한 동료로 믿고 따랐던 베니가 사실은 엄마인 미치와 친구 이상의 관계임을 눈치챈다. 새미는 베니와 다정해 보이는 장면들은 모두 잘라 내고 가족들과 영상을 다 함께 감상한다. 자신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잘 담아준 아들에게 미치는 자신을 진정으로 아는 건 새미밖에 없다는 말을 한다. 엄마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된 새미는 그런 미치를 예전처럼 대하지 못한다.
어떤 실재도 누가 어떻게 찍고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진실도 거짓이 될 수 있다. 허구를 진실처럼 찍어오던 새미는 진실을 허구로 만들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캠핑 영상 속에는 화목하고 다정한 가족들의 모습만 담겨 있을 뿐이다.
새미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게 된다. 그 사이 아버지를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가족 모두 이사를 하게 되는데 회사 문제로 베니는 그곳에 함께 하지 못하게 된다. 미치는 상실감을 감추지 못한다.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촉망받던 ‘피아니스트’로서의 미치도 없어져 버렸다. 남편 버트는 다정하고 똑똑했으며 아이들은 사랑스러웠지만 미치는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토네이도를 보기 위해 토네이도 가까이 차를 끌고 들어가던 미치는 지금 없다. 새미의 안전하고 견고했던 현실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학교 안에서조차 새미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열등생일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의 한해를 갈무리하는 ‘땡땡이의 날’의 영상을 찍게 되면서 새미는 자신을 괴롭혔던 로건을 영웅처럼 멋있게 연출한다. 그 덕분에 이전 여자친구와도 화해하게 된 로건은 왜 자신을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냐고 묻는다. 새미는 분명하게 말하진 않지만 아마 그 물음으로 자신이 이 일을 좋아하는 걸 넘어서 얼마나 잘하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됐으리라 생각한다. 본능적으로 관객들이 원하는 흥미로운 그림을 담기 위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미치는 결국 집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미치를 새미는 따뜻하게 안아준다. 가족 모두 미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메말라가도록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세계는 무너졌지만 이제 새미는 외로운 길을 걸어갈 용기가 생겼다. 이제 사자 입 속으로 머리를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평선은 아래에 있어도 좋고, 위에 있어도 좋지만, 가운데 있으면 더럽게 재미없는 거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코 더럽게 재미없는 영화만은 만들지 않겠다는 감독의 다짐 같다. 항상 기발한 방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또 다른 용기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용기는 예술이 되었다. 감독과 함께 나누는 ‘좋은 꿈’ 같은 영화가 또 다른 ‘꿈’들을 키우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