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습관 003_2019.12.02
“어른이 되면 피아노를 다시 배워야지.”
라는 다짐은 성인으로 인생의 1/3 지점을 지나서야 실현되었다. 시작에는 항상 두려움이 따라오는 사람이라 피아노가 정말 ‘처음’이었다면 나는 대뜸 피아노 학원으로 전화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퇴사하고 세 번째 되던 날, 아 이런 식이면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나에게 배움이란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발품을 팔 생각도 없이 우리 집 주소를 기점으로 제일 가까운 피아노 학원에 전화했다. 사실 세 개정도 리스트가 있었고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서 가격을 물어보고 비교해 보겠다 다짐했지만 첫 번째 전화를 걸자 말자 내일 바로 가겠다고 확답을 해버렸다. 일단은 오시라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고, 일단 내 성격상 신발을 벗고 ‘상담’이란 것을 해버린 이상 다음에 다시 올게요, 하고 일어날 용기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격은 주 3회 레슨, 한 달에 14만원. 직장인만 전문적으로 하는 피아노 학원은 주1회 레슨에 19만원을 부르는 곳도 많았기 때문에 가격은 괜찮았다.
다음날, 선생님과 1시까지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학원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정각에 전화를 거는 건 야박해 보일까봐 10분 뒤에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곧 도착한다는 대답을 듣고 10여 분 뒤에야 우리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분이 계단을 천천히 올라오셨다. 차가 밀려서 늦었다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일부러 불편한 티를 낼 필요는 없으니 나도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피아노를 쳐본지 오래됐으므로 바이엘을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종합장을 같이 하면서 음이름 외우는 연습부터 한다고 했지만 음계는 읽을 줄 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1년 동안 숱하게 했던 계이름 쓰기가 얼마나 지겹고 재미없는지 알고 있었다. 그보단 피아노를 치면서 바로바로 눈으로 읽고 체화시키는 게 나았다. 영어로 말하자면 직독직해라고 할까.
라며 자신만만해 했지만 막상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니 어디가 ‘파’이고 어디가 ‘라’인지 헷갈리긴 했다. 그래봤자 바이엘 1권이라 다섯 손가락만 쓸 줄 알면 어렵진 않았다. 오랜만에 다뤄보는 ‘악기’였다. 어깨를 쭉 펴고 계란을 쥔 것처럼 손을 동그랗게 말았다. 아직 제대로 칠 줄도 모르면서 내 스스로가 좀 멋있어 보였다.
영화보기와 독서가 아닌 음악을 취미로 가진 사람. 활자가 아니라 음표를 볼 줄 아는 사람. 세상 멋진 수식어를 내 앞에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미솔’을 누를 때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들리는 한쪽 어깨, 그리고 한 옥타브 올라가서 다른 건반을 누를 때 허공에서 우아하게 착지하는 손가락. 편집 일을 할 때 느껴본 적 없는 우아함과 고상함이었다. 사실 들려오는 소리는 뚱땅뚱땅 정도의 단순한 멜로디였지만 멜로디만이 전부인 세계가 주는 그 간극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았다.
처음에는 서툴렀던 부분도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손에 익었다. 한 장 한 장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좀처럼 느껴본 적 없는 성취감이 생겼다. 양손을 좀 더 복잡하게 써야할수록 그 성취감의 속도가 더뎌지긴 했지만 크기는 더 커졌다. 하루에 3시간, 4시간씩 손목이 아플 정도로 피아노를 쳤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또 기회가 없을 사람처럼.
2019.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