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습관 004_2019.12.03
피아노 학원은 장난치기 바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고함 소리로 가득하다. 아이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선생님이 한눈을 파는 틈을 타 술래잡기를 하고 간식을 나눠 먹는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는 하나의 장난감이고 좀처럼 장난감 앞에서 진지해지지 않는다. 작은 손가락으로 쾅쾅쾅 내리치며 시끄러운 징글벨을 연주한다. 어딘가에선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가 흘러나오고 어디서는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신이 없는 틈 속에서 피아노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친다. 먼저 온 순서에 따라 연습 시간에 따라 순번을 나누어 차례로. 아이들은 오늘은 몇 번 치냐고 몇 번을 되묻고 조금 모자란 개수를 채운 채 레슨을 받는다.
아이들은 다 큰 어른이 이 시간에 바이엘을 치는 게 신기한지 약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로 옆에서 나를 구경한다. 나는 최대한 신경을 안 쓰려고 노력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지면 잠깐 피아노를 멈추고 아이들을 같이 바라본다. 아이들은 금세 시치미를 떼고 다른 곳으로 뛰어간다. 마치 이 좁은 공간도 뛰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이 바쁘게.
그래도 이런 시장통 같은 소음 속에서 나는 아무렇지 않게 피아노를 친다. 이미 어릴 때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경험했던 풍경이고 나도 때론 말 안 듣는 학생 중 한명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어릴 때 대뜸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게 좋겠다고 통보하셨다. 피아노에 관심도 없었고 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던 때였다. 학원을 다니면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노는 시간도 만화보는 시간도 짧아질 게 분명했다. 나는 울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난 지금도 그때 엄마가 나를 피아노 학원이 아니라 영어 학원에 보냈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엄마는 내가 그때 알파벳도 제대로 못 읽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수학은 시험을 봤지만 내 기억에 영어는 거의 수행평가였지 시험을 본 기억은 없다. 아마 시험지가 있었다면 나는 울면서 영어 학원에 끌려갔을 것이다. 언어는 통하니까, 한글을 빨리 뗐으니까 영어도 빨리 뗄 거라고 엄마는 믿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지루한 계이름 읽기와 지루하게 반복되는 도솔미솔은 재미가 없었다. 기본기도 없고 어리니까 당연히 이해도도 떨어질 때라 재미없는 멜로디를 계속 반복했다. 나보다 오래 다닌 친구들이 피아노 소곡집이나 체르니를 연주하는 걸 보면서 기가 죽었다. 나는 도솔미솔을 한 백번쯤 반복하고 있는데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젓가락 행진곡이나 어디서 한번 들어봄직한 음악을 연주하면 괜히 민망해졌다. 내 손가락은 왜 이리도 작은 지 건반을 깊게 눌리는 것도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나도 ‘연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 재미를 붙였다. 바이엘만 치다가 몇 달이 지나자 피아노 소곡집이 추가 되었다. 거기엔 내가 아는 동요가 가득했고 박자를 셈할 필요가 없어서 음계만 정확하게 읽어내고 연습만 하면 따로 레슨 없이도 혼자 연주가 가능했다. 나는 연습시간에 재미없는 바이엘은 두고 좋아하는 동요를 연주했다. <아기 염소>라든가, <예쁜 아기 곰>과 같은 노래를 마음속으로 따라부르며.
그리고 비로소 <바이엘>을 마치고 <체르니>와 <하농>을 들어가게 되었다. ‘쉽게 배우는, 어린이를 위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알록달록한 <바이엘> 대신 묵직하고 어딘가 전문가의 포스가 나는 <체르니>를 받자 이제야 좀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시작한다는 기분과 설렘이 들었다. 그게 피아노를 배운지 1년 정도가 되었을 때고 엄마는 이제 되었다고 했다.
피아노는 1년 정도 배웠으면 됐다고. 엄마의 배움의 기준이 뭐였는지 그 동기가 뭐였는지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엄마는 내가 피아노를 치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내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봤으면 또 달랐을까? 나는 이번엔 더 배우고 싶다고 울면서 저항했지만 역시 세상사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지금이 딱 그 시점이다. 바이엘을 다 떼고 체르니로 들어가는 시점. 나는 이번 주까지만 다니고 몇 달이 지난 후에야 다시 등록을 할 생각이다. 피아노를 배운다고 미뤄둔 일들이 꽤 많다. 무언가 하나를 멈춰야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나는 또 잠깐 멈출 생각이다. 그리고 또 직장을 다니고 일을 시작하면 다시 배울 것이다. 다음 계절이 올 때까지 멋있게 연주할 수 있는 곡 하나 정도는 생길 수 있도록.
2019.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