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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 006. 전화

기록하는 습관 006_2019.12.05

by 이연

사회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게 있다면 전화로 할 내용과 문자로 할 내용을 구분하는 것이다. 확인이 바로 필요한 부분은 전화로 하고, 내가 요청한 부분을 재확인하고 변경 내용을 전달할 때는 메일을 사용한다. 언뜻 보면 비슷한 과정이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 저 둘의 구분은 중요하다. 입고되어야 하는 날짜가 분명한 도서인 경우 진행상황을 전화로 그때그때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량이 맞게 들어 갔는 지 인쇄상에 문제는 없는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변수 때문에 진행상황을 여러번 확인한다.

메일은 주로 저자들과 주고받는다. 오류를 정정하고 서로 확인해주어야 할 부분을 분명히 한다. 원고를 언제까지 받아야 인쇄날짜를 맞출 수 있는지 원고의 짜임새는 최소한 어느 정도를 맞춰주어야 하는지, 개요번호와 글자 스타일은 어떤 식으로 변경되는지 그 내용은 세세할수록 좋다. 저자는 바꾸는 게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분량이 천 페이지가 넘어가면 단순한 작업에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한다. 그럴 땐 내용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도록 문자로 남겨놔야 한다.

요령이 생기면 대부분의 일들은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인쇄 날짜에 책이 나오지 않으면 성가신 일들이 많이 생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짤릴 정도의 큰일은 아니다. 워낙 작업물이 많아 오탈자가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정해야할 부분을 체크하고 개정판에 보완하겠다는 구구절절한 메일을 쓴다. 비난도 내 몫이고 위로도 내 몫이다.

정말 힘든 건 대비할 수 없는 일이거나 내 잘못이 아닌 일이다. 입사 초반에는 편집일을 하면서 cs도 겸해서 해야 했다. 당시 경리였던 분이 경리일과 함께 cs도 함께 담당했는데 혼자서 모든 전화를 감당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사무실 분위기상 암묵적으로 전화를 나눠서 받았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막내인 내가 전화를 받는 비중이 자연스럽게 많아 졌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모든 일이 잘 풀려서 감사하다고 고객센터에 전화를 거는 일은 없다. 전화를 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화가 나 있거나 짜증이 나 있는 상태이고 때론 전화를 받자마자 화부터 내는 사람들도 있다. 대비할 수 없는 일에 전화가 울릴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랐다. 내 담당 업무가 아니었으므로 간단하게 구매내역을 확인해주고 배송상태를 확인해주는 것 외에는 내가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지금 바로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말에 내려앉는 한숨 소리와 짜증에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해야만 했다.

2년 정도가 지나 사무실이 분리되면서 cs에서 비로소 해방이 되었다. 만약 그 일을 내가 계속 해야 했다면 난 더 빨리 퇴사를 결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또 터득한 게 있다면 내가 고객센터에 전화를 해야 할 때 상대방이 정확하게 알아 듣고 처리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차분하게 내용을 정리해서(때론 메모를 해두고 읽는다) 말한다. 항의가 아니라 문의라는 어투로, 도착했다는 택배가 오지 않아서 곤란하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는 어투로.

택배가 도착하였다는 문자를 받았지만 택배가 없어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1:1 문의게시판이 있지만 이때는 전화로 처리하는 게 정확하고 빠르다. 상담사가 전화를 받고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이 부분은 택배사에게 문의 해봐야 한다고 고객님께 전화를 드릴 수 있도록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택배사에서 전화가 온다. 고객님의 물품이 누락된 것으로 확인되어 택배기사가 곧 전화를 줄 거라고 한다. 본인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괜찮다고 말한다. 택배기사에게 전화가 온다. 수령처에 택배가 도착하였으니 바로 가져가실 수 있다고 한다. 감사하다고 말한다.

쿠폰을 4000원치나 쓴 나의 택배 때문에 (거기다 무료 배송인데) 많은 사람들을 수고롭게 한 것 같아 약간은 송구스러웠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해야 하는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될까 생각해 본다. 사소하게 쌓이는 말들이 사람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그 생채기들은 내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전화를 끊을 때 마다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생채기가 오래가지 않도록.

201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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