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007. 퇴사
기록하는 습관 007_2019.12.06
어제는 예기치 않게 언니에게 퇴사 사실을 커밍아웃 했다. 언니는 연말에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가자고 연차를 낼 수 있느냐 물었다. 나는 당연히 백수니까 연차는 당장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달간 쉬면서 통장에서 줄어드는 잔고를 보면서 나는 좀 초조해지던 참이었다. 어제는 구직 사이트를 뒤져보다가 새벽 2시가 넘어 잠들었다. 나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직종 위주로 잡플래닛 후기를 뒤져보았다. 잡플래닛 특성상 어떻게 보면 당연하겠지만 왜 이리도 좋다고 하는 회사가 하나도 없는지 꼰대 고발 글들을 참담하게 정독하고 마음이 심란했다.
12월까지는 쉴 생각이었지만 불안했다. 담담한 척 올해까지는 쉴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이렇게 쉬다가 영영 쉬게 되는 게 아닐까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다음 주 여행만 끝나면 당장 이력서를 여기저기 찔러볼 예정이었다. 그래서 언니한테는 어물쩌물 돈이 없어서 안 될 거 같다고 했다. 그러자 그럼 시간은 되는 거냐고 물었다. 돈은 나중에 천천히 갚아도 되니까 같이 가자고 채근했다. 하지만 가족사이라도 없는 돈이 거저 나에게 오는 게 아니다. 거기다가 당장 돈이 아예 없어서 못 가는 게 아니라 들어올 돈이 없기 때문에 못 가는 거라 돈을 빌리는 것도 이상했다. 언니에게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고 빙빙 둘러 말하다가 언니가 썽을 냈다.
“같이 가기 싫은 거면 싫다고 해. 왜 거짓말을 해?”
언니가 돈도 빌려 준다고 했는데 못 간다는 말에 서운 했나 보다. 나는 바로 실은 퇴사 했다고 실토했다. 언니는 반색하며 좋아했다. 그러면 걱정할 게 뭐가 있냐고 같이 가면 된다고. 그래서 다음 주에 여행도 가야하고 그러면 돈이 별로 없고 취직도 바로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너 혹시 짤린 건 아니지?”
사실 짤렸으면 싶었으면 회사였지만(실업급여가 나오니까) 회사가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는 말 대신 퇴사 사유에 ‘이직’이라고 단출하게 적었다. 상무님이 퇴사 사유가 이게 다냐고 묻는 질문에 “그럼 정말 자세하게 길게 적어도 될까요?” 묻고 싶었지만 그냥 “네.”라고만 대답했다. 굳이 안 좋은 모습으로 퇴사할 필요는 없으니까. 사람 인연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연말에 면접보고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좀 더 쉬어. 좀 더 쉰다고 취직 안 되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같이 가자.”
사실 나는 언니의 말에 울 뻔 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찔끔 나온다.) 나는 약간 이휘재가 나왔던 [인생극장] 처럼 ‘결심했어’라는 결연한 표정으로 가겠다고 했다. 반복되는 호의에 거절하는 것도 미안했고, 스페인도 포르투갈도 가고 싶었다. 취직이 늦어질 까봐 초조한 내 모습도 너무 속상했다. 언니는 기뻐했고 여권이랑 먼저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같이 못 가게 되었다. 하하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들이 겹쳐서 항공권 예약이 어렵게 되었다. 언니는 괜히 바람만 넣어서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최대한 숨기고 싶었던 퇴사 사실을 알리고 말았다. 그래도 어딘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말자. 당장 취직과 여행을 고민할 수 있는 지금 정도의 여력에 감사하자. 그런 마음이 나의 걱정을 조금 밀어 냈다.
그리고 어제 브런치를 시작했다. 퇴사를 하고 헛되게 살고 있지 않다고 어디에라도 기록을 남겨 놓고 싶었다. [기]록하는 [습]관이라고 이름도 붙여 주었다. 설랬다. 나만을 위한 작은 공간이 생겼고 익명의 누군가가 나의 글에 좋다는 흔적을 남겨준다. 매일 쓰는 글은 최대한 꾸며 내지 않고 한 호흡으로 쓴다. 그래서 서툴고 어딘가 어색한 흔적들이 많다. 하지만 꾸준하기 위해 완벽해지지 않도록 한다. 아직 오지 않는 시간을 미리 불안해하지 말자.
아, 이젠 짐을 쌀 때다.
2019.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