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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 008. 오지랖의 유효성

기록하는 습관 008_2019.12.07

by 이연

여행 첫째 날은 언제나 설레면서도 두렵다. 전날 밤에도 체크리스트 목록을 몇 번이나 살피고 나서도 잠들기 전에 보조배터리를 잊지 말자고 한번 더 메모를 남겼다. 긴 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어찌나 많은지 혹시나, 하는 걱정들이 모여 짐이 된다. 혹시 다음 날에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쓸데없는 걱정도 생긴다. 알람을 십분 단위로 맞춰 놓는다. 눈을 감고 이제 진짜 자야지 생각을 하다가 다음날 티켓 날짜와 시간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혹시 하는 마음들이 모여서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그렇게 마음을 졸여 놓고 막상 집을 나서면 대담해진다. 여권만 있으면 다른 건 다 알아서 할 수 있어. 그제야 마음이 가벼워진다. 일부러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집에서 나와 어두운 골목길을 동생과 함께 걷는다. 도르륵 도르륵 소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여행의 들뜸을 대신한다.


나는 버스에 올라타고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배에서는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아 신중하게 노래를 선별해 다운로드하여 왔다. 플레이리스트를 넘겨서 첫 번째 노래를 고른다.



저 오늘 떠나요 공항으로

핸드폰 꺼 놔요 제발 날 찾진 말아줘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도 어쩔 수 없어 나

가볍게 손을 흔들며 bye bye-


쉬지 않고 빛났던 꿈같은 my youth

이리저리 치이고 또 망가질 때쯤

지쳤어 나 미쳤어 나 떠날 거야 다 비켜

I fly away-



볼빨간 사춘기의 <여행>은 여행길 첫 선곡으로 제격이다. ‘저 오늘 떠나요 공항으로’로 시작하는 노랫말은 전주부터 마음을 설레게 한다. 무언가 새롭고 가슴 벅찬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몸이 피곤했다. 걱정되는 마음을 내려놓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부산 노포동 터미널 역에 내려서는 아주 작은 사고가 있었다. 캐리어가 무거워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고 멀찍이 서 있자 아주머니가 가까이 바짝 다가와 있으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서 있으면 나이 많으신 분들이 새치기해서 제때 못 탄다고. 우리는 감사합니다, 말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주머니가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진다.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부산 사람들이 무뚝뚝하지만 또 곁을 살뜰히 챙기는 구석이 있다. 나는 어릴 적 그런 오지랖들이 조금 싫었다. 엄마가 남에게 부리는 오지랖도 싫었고, 알아서 할 텐데도 생판 남이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조언하는 것도 불편해했다. 하지만 서울 물을 조금 먹고, 그런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나이가 되자 그런 오지랖들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윤활유가 되는 지를 느낀다. 내가 무언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그 표정을 읽고 누군가 먼저 물어보는 일은 ‘서비스’의 형태가 아니고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앞에 선 덕분에 무사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지하철 문이 곧 닫힐 듯 열려 있었다.


“아이고, 뛰면 탈 수 있겄네. 어서 타라, 어서.”


우리 마음 급한 부산 아주머니께서 먼저 뛰어 나가시며 재촉했다. 나는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서 발걸음을 다급하게 옮겼다. 그런데 캐리어 바퀴가 틈에 걸리면서 내 몸을 따라오지 못한 캐리어가 넘어져 버렸다. 뛰쳐나가려던 나는 엎어진 캐리어 위로 다시 엎어지면서 왼쪽 무릎 아래 뼈를 부딪혔다. 그리고 나는 관성에 따라 캐리어 위를 쭉 슬라이딩하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매정하게 지하철 문은 눈 앞에서 닫혔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쪽팔렸다.


아주머니를 비롯해서 주변에 앉아 있던 어르신 분들이 놀라며 다가오셨다.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 넘어짐에 사람들이 걱정하며 괜찮냐고 물어보셨다. 그 말에 나는 웃음만 나왔다. 너무 웃겼다. 나의 상황이. 이 눈물 나는 정이... 다리뼈가 박살 나는 줄 알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벌떡 일어났다.


"아, 네... 정말 괜찮아요. 네, 네 괜찮아요. 하하하" 하면서 넘어진 캐리어를 일으켜 씩씩하게 걸었다.


동생은 옆에서 웃겨 죽을라고 했다. 나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동생한테 아프다고 했다. 더 크게 웃었다. 역시 피가 섞인 자매답다. 등 뒤에서 정말 괜찮은 게 맞는지 갸웃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 그래도 아무도 모른 척, 못 본 척하는 것보다 이게 인간적이지 않는가? 아, 아니다 오늘만큼은 다들 못 본 척 잊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못 봤으면 좋겠다. 나의 우스운 꼴을 못 본 눈을 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예사롭지 않은 여행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2019.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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