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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 009. 그린보트 : 첫 크루즈 여행

기록하는 습관 009_2019.12.08

by 이연


부산에 살 때 바다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역 이름 정도일 뿐이었다. 바다를 보기 위해 해운대나 광안리를 찾는 일은 없었다. 여름 피서로는 바닷가가 아니라 계곡으로 갔고 바닷바람의 짠내와 버석거리는 모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에 살면서 강릉이나 여수, 통영으로 바다를 보러 다녔다. 낭만적인 여행지는 어쩐지 바다를 끼고 있어야 하는 법인지 가고 싶은 곳에 바다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바다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크루즈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낯선 무언가였다.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 타는 이동 수단 정도로만 생각했다. 퇴사한 친구가 <그린보트>라는 여행 프로그램을 제안했을 때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다. 2005년부터 매해마다 에코라이프를 실천하기 위해 환경재단에서 기획한 크루즈 프로그램이었다. 배안에서 보내는 긴 시간 동안 강사들의 강연을 듣고 선사에서 준비한 파티를 즐길 수 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게스트도 화려했다. 유홍준, 정재승(일정 때문에 불참하셨지만), 은희경, 정유정, 이슬아 등등 7박 8일 동안 같은 배를 타고 강연도 들을 수 있다니 퇴사한 나에게 줄 수 있는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큰 고민 없이 친구에게 가겠다고 했다. 동생한테 말했더니 연차를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자기도 가겠다고 했다. 친구 역시 상관없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꽤 큰돈을 다른 기회비용과 저울질해보지도 않고 입금해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저것 따지다가 안 갔을 수도 있을 시간과 금액이었다. 당시 나는 퇴사 전이라서 무언가를 따지고 셈하고 견주는 모든 것들에 지쳐있을 때였다. 은희경, 정유정, 이슬아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공항이 아니라 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캐리어를 끌고 처음으로 크루즈를 마주 하자 그 거대한 규모에 깜짝 놀랐다. 바다 위에 빌딩 한 채가 누워있는 듯한 정도의 크기였다. 줄지어 걸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위를 떠다닐 우리의 숙소를 경의롭게 바라보았다. 비행기를 처음 탈 때처럼 두근거렸다.

크루즈에 오르기 전 여권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코스타 카드(배안에서 신용카드, 객실 키로 사용되는 신분증 개념의 카드)에 등록될 사진을 찍었다. 재단에서 자원봉사단으로 참여하는 스태프 외에 선내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은 외국인이어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영어에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셋다 영어에 유창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뻔뻔하게 알아듣는 척 오케이를 남발했다. 그러고 나서 문창과다운 추리력으로 맥락에 따라 그들의 말을 추론하며 깔깔댔다.

배에 타자마자 처음 한 일은 짐을 대충 풀어놓고 구명조끼를 입고 지정된 장소에 모여 피난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물놀이에서 쓰는 조끼와는 확실히 달랐다. 구명조끼에는 물이 닿으면 빛을 깜박이는 센서가 달려 있었고 주머니 안에 호루라기가 들어 있었다.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말로는 꺼내지 않았지만 숙연해지는 마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다아. 그치?”

우리는 그게 무슨 이유인지 알고 있었다. 긴급 상황 안내 방송이 나오면 모두가 이 장소에 구명조끼를 입고 나와야 한다는 설명을 영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들으며 우리에겐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만약의 상황에 대해 경청했다.

피난 훈련이 끝나고 나서는 곧바로 메인 레스토랑에 코스 요리를 먹으러 갔다. 자리를 안내받고 스태프 한 명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프로볼로네 치즈가 들어간 나폴리 스타일의 소고기 롤과 으깬 감자’라던가 ‘레몬 케이퍼가 소스를 곁들인 구운 틸라피아’라던가 한글이지만 이미지로 쉽게 전환되지 않는 메뉴명을 한참 들여다봤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뭘 시켰는지 금세 잊어버리곤 메뉴가 나올 때마다 우리 시키지 않은 걸 받은 사람 마냥 놀라워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음식은 대체로 맛이 없었다. 모양새는 괜찮았으나 야채는 싱겁고 고기는 질겼고 면에는 간이 배이지 않았다. 우리는 다소 충격적인 맛에 서로 다르게 고른 음식을 권하며 맛없음을 공유했다. 그래도 디저트는 먹을 만했는데 단맛은 그래도 만국 공통된 맛이구나, 다행이라고 여겼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은 온통 깜깜했다. 빛이 없으니 하늘도 바다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바닥이 가볍게 움직여 비틀댈 때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육지가 아니라 바다임을 체감하게 했다. 우리는 멀미약 하나씩을 나눠 먹고 금세 잠이 들었다.

201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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