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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Dec 26. 2019

<미안해요, 리키> 당신에게 내 ‘일’을 배달합니다

켄 로치 <미안해요, 리키>, 2019



메인 포스터만 보고 연말에 어울리는 따뜻한 가족 이야기일 줄 알았다. 영화 상영 내내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화가 감동적이라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 아니었다. 착하고 성실하기만 해선 도저히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든 선한 이들의 절규 속에서 터지는 울음이었다.

영화는 택배회사 감독관인 말로니와의 면접으로 시작된다. 리키는 말로니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한다. 말로니는 이것은 ‘자영업’이며 강요하는 것 없이 본인이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언뜻 보면 합리적이다. 하지만 리키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빚이 생긴다. 물건을 싣고 옮길 차가 없기 때문이다.

리키에게는 생산수단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이다. 회사에서 당연히 지원해줘야 할 차는 돈을 주고 빌리거나 사야만 한다. ‘자영업’이기 때문이다. 리키는 아내 애비에게 부탁한다. 간병일을 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이 모든 건 우리 가족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마이너스에서 본전을 찾고 플러스가 되기까지, 그리고 대출금을 다 갚을 때까지 2년이란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을 시작한 리키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 영화의 초반까지 그렇다.

갈등은 세브의 일탈로 심화된다.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일을 하는 리키와 애비는 일을 쉽게 쉴 수 없다. 아들의 정학 논의가 오고 가는 자리에서도 리키는 시간을 맞춰 가기 어렵다. 리키는 애비에게 화를 내고 세브는 이러한 상황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불만스럽게 행동한다. 세브는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간다고 해도 자신의 삶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키와 애비는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힌다. 나도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다고 서로를 공격한다. 하지만 세브는 자신의 불만을 그래피티로 표현한다. 세브는 자신의 나름대로 현실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마치 세브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가족이 망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은 세브때문이 아니다. 저녁을 가족과 함께 하고 싶어도 하루 동안 그들이 끝내야 하는 일은 너무나도 많다. 착한 애비는 온몸이 더러워진 자신의 환자를 돌보기위해 초과수당도 받지 못하면서도 일을 하고 는 화장실 갈 틈도 없이 배송시간을 맞추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없는 계단을 달린다. 철이 일찍 들어 버린 라이자는 누군가의 기척에 쉽게 깬다. 모두가 예민한 살얼음판을 밟고 서 있는 것 같다. 모두가 노력하고 있지만 그들이 딛고 있는 발아래는 좀처럼 단단해지지 않는다. 평소에 언성을 높이지도 욕도 하지 않는 애비가 병원에서조차 벌금 얘기를 하는 말로니에게 소리를 지르며 우는 장면은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이 영화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이다. 마지막 리키가 애비에게 메시지를 남기던 종이는 고객이 부재중일 때 남기는 쪽지이다. <미안해요, 리키>가 담기에는 원제가 가진 상징이 더 강하다. 리키와 애비는 법이 놓친 사람들이다. 그들의 성실을 빌미로 모든 부당한 노동조건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일을 하면 할수록 리키가 가진 빚은 늘어만 간다. 리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차에 시동을 건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리키는 일을 하러 간다. 숨만 쉬어도 마이너스가 되어버리는 하루하루를 리키는 견딜 수 없다. 부당하다고 맞서 싸울 수도 없다. 그러기에 리키에게는 책임져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엉망이 된 얼굴로 회사로 향하는 리키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관객들에게 해결되지 않는 막막함을 안겨주고 끝이 나버린다. 우리를 키워낸 부모님의 삶도, 이어질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숨 막히는 예감 속에서 관객들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리키는 자신의 ‘일’을 배달해야 한다. 그래야만 겨우 마이너스가 아닌 ‘내일’이 온다. 그들이 원하는 건 가족과 함께 저녁을 함께 할 수 있는 소박한 시간이지만 2분 단위로 독촉당하는 그들은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버린다. 주 52시간 근무제를 놓고 ‘더 일하고 싶은 사람은 어쩌느냐’는 국회의원의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더 일하고 싶지 않지만 일하게 만드는 시스템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의 리키에게 미안해지지 않는 ‘내일’이 오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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