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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Jan 01. 2020

<우리들> 경계선 위에 선 우리들

윤가은 <우리들>, 2016

영화의 오프닝. 피구팀을 짜는 친구들의 호명 속에 선이는 눈치를 보며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초조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간간이 웃어가며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도 선이의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이름이 불린 친구들은 화면에서 한 명씩 사라지고 선이만 남는다.


이 영화, 마냥 편하지만은 않겠구나 생각이 든다. 흔들리는 선이의 눈빛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이며 내가 가졌던 것이다. 영화 <우리들>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나의 유년 시절로 친절하고 잔인하게 안내한다.


수업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견디기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새 학기 단짝 친구를 만드는 데 실패했을 때, 침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 속에서 나 홀로 침잠하는 기분을 안다. 나는 분명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한 소외감과 밀려오는 외로움에 대해서 아마 다들 조금씩은 알 것이다.


이 영화는 선과 악을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은근한 멸시와 따돌림에 대해 훈계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선이 줄곧 어른이 아니라 아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보라가 미웠고, 마음을 몰라주는 지아가 미웠고, 다칠 줄 모르고 다가가는 선이가 답답했다. 허물없이 자신의 결핍을 받아들여 주는 친구가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또래 사이에서 주류가 되고 싶은 욕심이 선이와 지아의 관계를 망가뜨렸다. 


봉선화 물과 매니큐어는 선이 지아와 보라와 맺고 있는 관계를 잘 보여준다. 선이는 우울해하는 지아에게 어설픈 위로의 말 대신 봉숭아 잎을 곱게 빻아 손톱에 물을 들여 준다. 지아와 싸운 선이는 팔찌를 끊어버리는 것으로 지아와의 관계를 끝내려고 하지만 손톱에 들어 있는 빨간 물은 아직 남아 있다. 선이와 관계가 어그러진 지아 역시 보라가 주도하는 세계에 완벽하게 편승하지 못한다. 늘 1등을 도맡아 하던 보라의 자리를 지아가 차지하고 만 것이다.


우연히 울고 있는 보라를 본 선이는 보라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매니큐어를 받는다. 선이는 빨간 물이 빠지지 않은 손톱 위에 파란색 매니큐어를 바른다. 혼자 매니큐어를 바르는 선이의 손은 서툴다. 시간이 지나고 파란색 매니큐어는 조금씩 벗겨진다. 보라와 조금 가까워졌다고 느꼈던 선이의 착각처럼 매니큐어는 벗겨지고, 지아와 몸싸움을 하기 전까지도 붕선화 물은 다 빠지지 않고 손끝에 머문다.


서로에게 해서는 안 될 말로 상처를 준 둘은 이제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워 보인다. 선생님의 중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해답은 어린 동생의 입에서 나온다.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피구로 편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선이는 이제 초조해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은 사람은 지아이다. 하지만 선이는 전혀 기쁘지 않다. 자기한테 했던 것처럼 지아가 금을 밟았다며 밖으로 나가라는 아이들의 억지에 선이는 지아가 금을 밟지 않았다고 지아의 편을 든다. 서로 반대편이지만 선 위에 나란히 선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끝이 난다.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사건도 있지만 어떠한 사건이 관계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미워하는 마음보다 놀고 싶은 마음이 큰 선이는 아마 지아에게 다시 손을 내밀 것이다. 손톱에 든 봉선화 물은 이제 거의 다 빠졌다. 지아는 다시 선이의 손을 잡을까? 영화 포스터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붉은 봉선화 꽃잎 사이로 선이와 지아가 보인다. 봉선화 잎을 빻고 있는 사람은 선이가 아닌 지아이다. 선이와 지아는 다시 ‘우리’가 되어 새로운 빛깔로 둘의 관계를 물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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