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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Jan 02. 2020

<우리집> 아이들이 자꾸만 어른이 된다

윤가은 <우리집>, 2019

<우리들>에서 <우리집>으로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은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세계를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우리들>이 어른이 배제된 ‘아이’들의 세계에서 꿋꿋이 버텨내야 하는 시간을 다뤘다면 <우리집>은 ‘어른’들이 배제될 수 없는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집’이라는 공간을 다룬다.


<우리집>에서 아이들의 연령대는 좀 더 다양해졌다. 주인공 하나는 12살, 하나의 오빠인 찬은 15으로 세 살 터울이다. 그리고 유미는 10살, 유진은 7살로 마찬가지로 세 살 터울이다. 여기서 조금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빠 ‘찬’을 낳을 예정이 없었는데 생긴 아들처럼 묘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3년 뒤에 하나를 다시 낳았다는 것. 영화에서의 설정이 출장과 이사를 자주 다니는 것처럼 묘사되는 유미의 집에도 아이가 세 살 터울로 또 두 명이라는 것. 집에서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장녀같이 어른스러운 하나의 성격이 그렇다.


물론 다 가능한 설정이지만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기 위해 만들어 냈다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우리들>의 주인공이었던 ‘선’의 욕망은 단순했다. 자신에게도 단짝 친구가 생기는 것. <우리집>은 지켜야 할 것이 ‘집’이 되어버리면서 주인공 하나가 많은 짐을 짊어지고 시작해버렸다. 하나는 반에서 선행상을 받을 만큼 착하고, 집에선 시키지도 않은 부엌일을 하고, 언니를 잃은 낯선 아이를 따라 온 동네를 함께 누빈다. <우리들>에서 ‘선’의 행동이 왕따에서 벗어나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모든 게 설명이 된다면 <우리집>에서 하나는 영화 초반에 다소 작위적으로 움직이는 장면이 많다. 속 깊은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때 영화는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하지만 그런 부분만 넘어간다면 <우리집>은 어린 아이의 시점으로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톤으로 잘 끌고 나가는 영화이다.



답을 내리지 않는 ‘이혼’에 대한 시선


미성년인 아이들에게 집은 곧 세계이다. 성인이 되기 전까진 경제적 도움 없이 본인의 의지로 벗어나기 힘든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부모님의 불화는 재앙이다. 하나는 어떻게 해서든 부모님의 이혼을 막으려고 하지만 찬은 그렇게 매일 싸울 거면 차라리 이혼을 하라고 화를 낸다. 영화 결말부에서 한 번 더 말하겠지만 영화는 이혼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집이 정서적인 공간(하나)과 물리적인 공간(유미)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아이들이 느끼는 불안에 대해서 깊이 있게 말을 한다.



정서적인 공간으로의 집


초반에 하나가 식구들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장면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밥상을 차려놓고 입으로 떠먹여 줘도 안 먹고 갈 나이인데 차려놓은 밥상도 거부하는 식구들이라니. 하지만 이 부분은 이후에 우유를 쏟고 혼날 걸 걱정하는 하나의 모습을 통해 하나가 부엌일에 집착하는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집안일을 안 해서, 라면을 먹으면서 노트북을 치워놓지 않고 먹어서 미운 게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이 미워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미워 보이는 것이다. 집안일로 아빠를 타박하자 하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해놓는다. 노트북에 우유를 쏟고 덜컥 겁을 먹은 것은 노트북에 라면 국물이 튄다고 잔소리 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일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하나를 혼내지 않는다. 엄마는 하나를 사랑하고, 아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 사라진 관계에서 미움만 남은 둘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이혼이다. 하나가 왜 가족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부모님은 하나가 원하는 가족여행을 마지막 선물로 해주고자 한다. 어른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다.


영화 <우리집> 스틸컷


물리적인 공간으로의 집


유미와 유진이 자아내는 공간은 천진난만하다. 하나의 집에 닥친 위기는 부모님의 날선 대화에서 시시각각 느껴지지만 유미가 살고 있는 집은 갑작스러운 주인집 아주머니의 방문만 아니면 평화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평화는 ‘방치’에서 온다. 유미와 유진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사실 ‘이사’가 아니라 ‘방치’이다.


유미가 위급할 때마다 부모님은 전화를 받지 않고, 가끔 보러와준다는 삼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 어린 유미와 유진은 만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버려진 상자를 뒤적거리면서.


그리고 하나와 유진은 그 버려진 것들로 집을 만든다. 자신들의 집을 지키기 위해 소망을 담아. 그리고 그 집은 결국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버리고 부서지고 만다. 버려진 것들은 끝내 버려지고 만다.


영화 <우리집> 스틸컷


누군가 버리고 간 집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은 산모와 남편이 남기고 가 버린 텐트 안에서 몸을 누인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집이 우리집이면 좋겠다는 아이들의 바람은 진심이다. 얇은 천으로 된 천막 안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안온함은 거짓이다. 해가 뜨면 아이들은 없어져 버릴 집으로 가야만 한다.



공간은 사라져도 남는 것은 관계


유미는 하나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언니는 계속 우리 언니 해줄 거지?”


유미는 결국 이사를 갈 것이고, 하나의 부모님도 아마 이혼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집으로 향한다. 이 영화 어떻게 끝나게 될까 가장 궁금해지는 장면이었다. 극적인 상봉을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하나는 밥을 하고, 그런 하나를 보는 가족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영화가 아니었다면 주인공의 등짝이 불이 나도록 맞고 나서야 무엇이든 시작을 했겠지만 가족들은 다들 자리에 가만히 앉는다. 그리고 유미는 밥을 먹자고 한다. 그리고 밥그릇에 부딪는 수저 소리가 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하나는 무슨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했을까. 부모님께 혼이 날 걸 알면서도, 부모님이 이혼을 할 걸 알면서도 식사를 준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하나가 하지 못한 말을 유미가 대신했다고 생각한다.


이혼을 해서 부모님이 남남이 되더라도 우리는 가족이라는 사실. 이혼을 하더라도 엄마는 여전히 유미에게 엄마고, 아빠도 여전히 유미에게 아빠이다. 이혼 후에 물론 많은 것이 바뀌겠지만 그래도 우리 같이 마주 보고 밥 먹던 가족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처음엔 마지막 장면이 의아했지만, 곱씹어보면 <우리들>에서 느꼈던 마지막 장면에서 느꼈던 먹먹함과 맞닿는다. 결국 해결되는 건 없다. 하지만 현재를 통해서 아이들은 성장해 나가고 있고 계속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까메오로 나왔던 아이들처럼 어딘가 아이들은 계속 자라 어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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