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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Jan 06. 2020

<잘 살겠습니다> 축의금으로 환산되는 관계의 얄팍함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리뷰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나 더 비싸다는 거."
/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중「잘 살겠습니다」


나에게 좋은 소설은 몰랐던 세계를 알고 공감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런 공감은 때론 어떤 현상에 분노하고 실천하게 만들기도 한다.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20, 30대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익숙한 구체적인 말들, 그리고 숫자(축의금, 연봉 등)들이 글 읽기의 장벽을 낮춘다. 하지만 그 공간이 내가 아는 세계, 내가 안다고 착각하는 세계라면 어떨까?


『일의 기쁨과 슬픔』에 실린 첫 번째 소설 「잘 살겠습니다」는 어리숙하고 눈치 없는 빛나와 모든 일에 철저히 계산적인 ‘나(화자)’가 나온다. 일학년 때부터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삼고 대외활동과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린(14p) 주인공은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지만 눈치와 센스가 없는 빛나를 보며 갑갑증을 느낀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빛나의 무신경함에 독자들도 갑갑증을 느끼게 되는데 그 무신경함은 자주 ‘돈’으로 환산된다. 빛나가 지각을 하고, 카톡 프사를 감정에 따라 자주 바꾸고, 이중계약 사기를 당하는 모습만으로는 그 갑갑함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빛나가 ‘나’에게 빚진 ‘커피값’과 ‘축의금 대신 먹은 밥값과 청첩장을 주면서 산 밥값을 뺀 12,000원’이라는 숫자는 빛나와의 관계를 줄다리기하듯 명확하게 보여준다. 축의금 오만원 정도의 사이(23p). 우리는 그 말만으로 정의될 수 있는 관계의 얄팍함을 안다.


빛나는 아직 특 에비동과 그냥 에비동의 차이를 돈으로 환산시킬 줄 모른다. 본인에게 철저하지 않고 ‘총무과 라푼젤’과 ‘전체회신녀’라는 별명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반면에 ‘나’는 ‘이걸 왜 나한테 줘?’하는 눈빛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8p)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서이동에 대한 ‘나’의 욕망은 현실이 되었고 그 단계를 넘지 못한 빛나는 결혼 휴가를 눈치 보며 결혼식 전날에도 야근을 한다. 그리고 빛나는 12,000원치의 선물에 감동하며 눈물을 흘리고 프사까지 바꾸고 만다. ‘나’는 빛나에게 세상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28p) 알려주고자 했지만 빛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빛나의 이름이 ‘빛나’인 것, 화자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빛나는 어쩌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빛나’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호명되며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받아온 관심과 주목을 무시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주위의 눈치를 보며 거저 얻어지는 게 없다는 걸 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취업을 위해 달려온 나는 자라오면서 부모의 종종거림(28p)을 봐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에게 빚지는 게 어떤 건지, 내가 베풀어야 받을 수 있다는 세상의 이치를 빨리 깨우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노력과는 다르게 구재는 자신보다 천삼십만원의 연봉을 더 받고, 빛나는 집 근처에 집을 해주는 시댁을 만난다. 소설은 이 부분에서 또 다른 갑갑증을 독자에게 남긴다.


‘축하해주신 마음 잊지 않고 잘 살겠습니다(33p)’라는 다짐은 보통 오래가지 않는다. 조잡한 폰트로 쓰인 그 형식적인 인사말에 누구도 감동하지 않는다. ‘답례’떡인 구체적인 실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들을 떠올린다. 경단을 우물거리는 시간만큼 ‘나’는 빛나 언니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와 빛나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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